북한의 국책연구소가 외화난 타개를 위해 라진항을 중계무역항으로 개발하는 등 항만과 철도를 적극 활용해 아시아와 북극,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통로로 만들자고 제안한 것으로 10일 확인됐다. 국제금융시장에 진출해 파생금융상품을 적극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도 제시됐다. 본지가 이날 입수한 ‘조선사회과학원보’ 2020년 2호(5월 발간)에 수록된 내용들이다. 이 같은 제안들이 북한 수뇌부의 비준을 받았다거나 정책 변화를 시사하는 것이라면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중국 선박이 2015년 4월 북한 라진항에서 석탄 선적을 마치고 출항을 준비하고 있다. 당시 라진항에선 남북한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나진-하산 프로젝트' 2차 시범운송 사업을 진행했다. /통일부 제공
중국 선박이 2015년 4월 북한 라진항에서 석탄 선적을 마치고 출항을 준비하고 있다. 당시 라진항에선 남북한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나진-하산 프로젝트' 2차 시범운송 사업을 진행했다. /통일부 제공

하지만 외교가에선 “고강도 대북 제재로 자동차 한 대, 배 한 척도 북에 들어가기 어려운 상황에선 모두 꿈같은 얘기들”이란 반응이 주를 이뤘다. 고위급 탈북민 A씨는 “대북 제재와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극심한 외화난을 겪는 북한 당국이 학자들에게 타개책을 내놓으라고 닦달해서 나온 면피성 아이디어 같다”고 했다.

조선사회과학원보는 북한 최고 권위의 국책연구기관인 조선사회과학원의 기관지로 1년에 네 차례 발행된다. 본지가 입수한 것은 지난 5월 발행된 ’2020년 2호'다. 필자 원철웅은 '나라의 유리한 지정학적 조건을 옳게 리용하는 것은 대외 경제 관계를 확대 발전시키기 위한 중요 방도’라는 글을 게재했다. 그는 제재 상황에서 외화를 벌기 위한 방법으로 지정학적 조건을 적극 이용하자는 주장을 펴며 “라진항만 놓고 보아도 국제적인 중계무역항으로 개발되면 중국과 러시아, 몽골에서 일본, 중국 대북(대만), 중국 홍콩과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나라들로 가는 짐들을 중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우리는) 라진항, 선봉항, 청진항과 같은 항들과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철길, 중계도로망을 가지고 있어 해상 수송과 육로 수송을 다같이 보장할 수 있는 관문, 지름길”이라고 했다. 특히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철길 통로 하나만 놓고 보아도 우리나라 통로가 제일 유리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며 남북 철도 연결에도 관심을 보였다.

또 다른 필자 김경민은 ‘파생금융상품 투자에서 리용되는 몇 가지 방법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파생금융상품투자를 통하여 더 많은 외화를 획득하며 대외 거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파생금융상품 투자 방법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통일부 차관을 지낸 김형석 대진대 교수는 “라진·선봉 개발은 1990년대 초반부터 나오던 얘기로, 북한은 제재가 없던 시절에도 ‘체제 리스크’를 우려해 투자에 소극적이었다”며 “라진항을 중계무역항으로 만들고, 유라시아 철도를 연결하려면 비핵화는 물론이고 중국 수준의 개혁·개방을 이뤄야 한다. 실현 가능성이 낮은 얘기”라고 했다.

전직 고위 외교관은 “당분간 제재 완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중국·러시아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관심을 가질 만한 아이템을 띄워 국제사회의 제재 공조를 흔들어 보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했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라진항과 북한 동해 항구에 눈독을 들여온 중국·러시아, 철도 연결에 관심이 큰 한국 정부를 겨냥한 구상인 듯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