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준
/인민군장교 출신·97년 탈북

강원도 원산에서 나서 자랐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 명사십리와 송도원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의 진짜 명물은 한 달에 두 번씩 일본에서 건너오는 만경봉-92호다. 이 배는 닫힌 북한 사회에 해외문물을 실어나르는 역할을 해왔다. 평양∼원산 간 고속도로를 통해 진귀한 물건들은 평양으로 고스란히 올라가겠지만, 그 통로인 원산에 떨궈놓고 가는 것이 왜 없겠는가.

평생 가도 외국사람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운 북한이지만, 원산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신기할 것이 없었다. 70년대 말부터 오기 시작한 조총련 고향방문단을 비롯해 적지 않은 외국인들이 원산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갔다.

이 배는 「불평등」을 실어오고 있기도 했다. 듣기로 만경봉호 탑승 종사자들의 70% 이상이 대남연락소(대남공작부서) 소속 요원들이라고 했다. 홀에서 봉사하는 아가씨들과 항해사들도 대성무역총국의 사원들로 대부분 중앙당 간부의 자녀나 권력계층 출신이다.

우연히 이 배에 올라가볼 기회가 있었다. 여기서는 북한식 규칙이 통하지 않았다. 도색잡지나 음반, 비디오테이프도 얼마든지 있었다. 종업원들의 옷차림도 북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야했다. 이들은 『서비스는 일본여성처럼 해야 장사가 잘 된다』고 교육을 받는다고 했다. 억양과 자세, 몸짓, 심지어 눈빛까지 왜풍(倭風)이었다. 북한에서 목이 터져라고 주장하는 「일본제국주의」 「반동들」 「썩고 병든 자본주의」 등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헷갈렸다.

만경봉호가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은, 바로 이 배를 타고 1950년대부터 북한으로 건너온 재일교포 후예들이다. 원산에도 「귀국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적잖게 살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가히 「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람도 상당수였다. 원산에 있는 두 개의 운송회사 지배인(사장)들도 모두 북송 재일교포 출신이었다. 북한에서 「귀국자」들이 출신성분에 밀려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없는 통례에 비추어 보면 파격적인 일이었다. 일본의 돈 많은 친척들이 일제 고급 화물트럭을 50대나 기증한 결과라고 했다.

자동차를 개인 소유로 등록할 수 있는 사람들도 이들밖에 없었다. 물론 도의 최고 간부인 도당 책임비서 등 10여명이 독일산 「메르세데스 벤츠」를 탈 수 있었으나, 일반인에게는 어림없는 일이다. 「귀국자」라 할지라도 권력의 상징인 「벤츠」만은 탈 수 없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자 일본측 부자들이 돈을 기증하지 않는 등 암묵적 항의를 해 그나마도 풀렸다.

「권력」 가진 이들이 「돈」 가진 이들을 더 이상 못 당하는 듯했다. 이탈리아산 샹들리에, 독일제 변기, 일제 알루미늄창 등 고급 간부들조차 꿈꿀 수 없는 생활을 「귀국자」들은 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만경봉호는 이들에게 옷가지나 식료품 일체, 심지어 액화석유가스(LPG)통까지 실어나르고 있었다.

돈을 가진 쪽에서는 「권력」에 아부했고, 권력을 가진 자들은 「돈」 가진 자들의 눈치를 보았다. 만경봉호가 가져올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배가 도착하는 날이 명절이었겠지만, 우리에게는 상실감만 더할 뿐이었다. 『자본주의는 저런 것이구나』를 명백하게 가르쳐 준 만경봉-92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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