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일러스트=안병현

한국으로 온 지 벌써 3년이 됐다. 그사이 지인 가족의 장례식에도 여러 번 갔는데 북한과 장례문화가 너무 달라 놀랐다.

장례 장소부터 달랐다. 아는 분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조문하러 갔는데 병원에 딸린 장례식장이었다. 물정을 모르니 부모님이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사망하신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집에서 돌아가셔도 장례식장으로 모시고 간다고 했다. 북한에서는 장례를 집에서 치른다. 병원에서 사망해도 시신을 옮겨 집에서 한다. 그게 자식 된 도리라고 생각한다.

장의사라는 직업도 처음 봤다. 북한에선 부모가 사망하면 동네에 사는 나이 드신 분이나 상주가 염습한다. 시신이 부패하니 가급적 빨리 시신을 정결하게 닦은 다음 필요한 부위를 싸고 솜으로 막은 다음 새 옷으로 갈아입힌다. 고인이 지병이 있어 사망할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되면 미리 수의를 만들어 놓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수의를 따로 장만하지 않고 면으로 된 좋은 속옷을 장만해뒀다가 사망한 즉시 갈아입힌다. 남자는 양복을, 여자는 한복을 입힌다. 한국처럼 베로 만든 수의는 생각도 못한다.

한국에선 입관하기 직전 수의로 갈아입히지만 북한에서는 고인에게 입히기 편한 형태의 수의가 따로 없다 보니 시신이 굳기 전 빨리 좋은 옷으로 갈아입힌다. 염습이 끝나면 시신을 집에서 제일 좋고 큰 방에 모시고 흰 천을 치고 천 위에 영정 사진을 붙인다. 그런 다음 작은 밥상에 음식을 놓고 향불을 피운 뒤 조문객들을 받는다.

조문 방식도 남과 북이 다르다. 북한에서는 조문객이 고인의 밥상에 술 한 잔을 부어 놓고 절하기도 하고 서서 묵념하는 사람도 있다. 친척이 아니면 대부분 묵념한다. 조문객마다 고인에게 술을 부어야 하니 장례에 제일 필요한 것이 술이다. 술은 세 번 꺾어 잔에 붓는다. 한국에서는 국화를 놓기도 하던데 북한에서는 꽃을 놓는 법은 없다. 상주와 조문객이 서로 맞절하지도 않는다. 그저 상주의 손을 잡고 위로한다. 저녁이 되면 상주가 외롭지 말라고 카드놀이나 장기를 두면서 밤을 새운다.

입관은 사망한 날 자정에 한다. 시신 보관 시설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입관식을 할 때 마지막으로 고인의 얼굴을 보고 관에 못을 친다. 입관은 대개 상주의 직장 동료가 한다. 고인이 사망한 지 사흘째 아침 발인하는데 관이 집을 나갈 때 문턱에 접시를 놓고 관을 들었다 놓아 접시를 깬다. 그래야 온갖 귀신들이 다 물러간다고 믿는다.

요즘은 나무가 귀해 관 구하기가 어렵다. 돈만 있으면 장마당에서 나무를 사면 되지만 항상 관을 짤 나무가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사람이 갑자기 죽으면 여러 곳으로 사람을 보내 나무부터 구한 다음 목수에게 부탁해 관을 짠다. 다음이 장례 음식과 술 장만하기다. 집에서도 준비하지만 대부분 상주 직장에서 도와준다. 직장마다 당 조직이 있는데 당 세포 비서의 주요 임무 중 하나가 동료의 부모가 사망하면 직원을 동원해 술, 음식 등을 구입해서 상주에게 부조하는 것이다.

평양의 경우 20년 전까지만도 시신을 평양시 주변 산에 묻었으나 지금은 평양시 낙랑구역 오봉산 관리소에서 화장한다. 화장한 유골은 자기가 사는 구역의 유골보관소에 맡겨 두고 추석이나 고인 사망 날에 찾아 제사를 지낸다.

한국에선 점점 상주들이 편하게 장례가 변하고 있다. 장례는 전문 장례식장에서 하고 염습은 장의사 손에 맡긴다. 조문객에게 음식과 술을 내주는 일은 상조회사에서 하니 상주는 조문객만 받으면 되는 것 같다. 아마 이것이 자본주의의 힘일 것이다. 통일이 돼 북한에서 돈 벌 수 있는 유망 사업이 장례 사업이 아닐까 싶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24/20190524018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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