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멜수도원… 공산군에 잡혀 평양~중강진까지 '죽음의 행진' 끌려가
순교한 마리 메히틸드·테레즈 수녀 福者 추대 위한 현장 검증 열려
 

면회실은 격자무늬 창살로 2등분돼 있었다. 면회객 쪽보다 창살 건너편이 왠지 더 밝게 느껴졌다. 수녀 10여 명의 맑은 미소 때문이었다. 서울 수유동 '서울 맨발 가르멜 여자수도원'. 면회실조차 사진촬영·녹음이 금지된 이곳은 '봉쇄 수도원'이다. 창살 건너편은 '봉쇄 구역'. 교황령으로 정해진 봉쇄 수도원은 천재지변, 국가 재난 등 몇 가지 이유 외에는 오로지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위해 스스로 세상과 격리시킨 채 살아가는 곳이다. 한 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다. 5·16 당시 장면 총리가 피신한 곳이 서울 혜화동 가르멜수도원이었다.

이 수도원의 육중한 철문이 지난달 27일 오전 잠시 열렸다. 6·25 때 납북돼 중강진까지 끌려가 순교한 마리 메히틸드(1889~1950), 테레즈(1901~1950) 수녀의 복자(福者) 추대 현장 조사를 위해서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位)' 등 6·25 전후를 비롯해 20세기에 순교(殉敎)한 천주교 인물의 시복(諡福)을 추진하고 있다. 천주교는 이 절차를 '시복 법정(法廷)'이라 부른다. 법정은 '재판관' '검찰관' '공증관' 등으로 구성된다. 현재 시복 심사를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중이고, 이날은 일종의 '현장 검증' 자리였다. 재판관 유흥식 주교(대전교구장)와 재판관 대리 박선용 신부, 시복 청원인이자 총무인 류한영 신부, 공증관 장후남씨,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조한건 신부 등 10여 명이 참석했다.
 
봉쇄 수도원의 빗장이 잠시 풀렸다. 유흥식(오른쪽) 주교를 비롯한 ‘시복 법정 재판관’ 일행이 지난주 가르멜수도원을 찾아 6·25 당시 공산군에 납치돼 순교한 수녀들에 관한 자료를 살피고 있다.
봉쇄 수도원의 빗장이 잠시 풀렸다. 유흥식(오른쪽) 주교를 비롯한 ‘시복 법정 재판관’ 일행이 지난주 가르멜수도원을 찾아 6·25 당시 공산군에 납치돼 순교한 수녀들에 관한 자료를 살피고 있다. /김지호 기자
벨기에 출신으로 프랑스의 에르 가르멜(Carmel d'Aire)수도원에서 원장까지 지낸 마리 메히틸드 수녀는 1939년 조선에 도착, 이듬해 가르멜수도원을 창립해 초대 원장을 지냈고 테레즈 수녀는 2대 원장을 지냈다. 이들은 서울이 공산군에 함락당하기 직전인 1950년 6월 27일 비행기로 탈출할 기회가 있었으나 "한국인 수녀는 탈 수 없다"는 말에 포기했다. 이후 외국인 수녀 5명은 7월 15일 공산군에 체포돼 평양을 거쳐 중강진까지 끌려갔다. 이른바 '죽음의 행진'이었다. 마리 마들렌 수녀 등 '죽음의 행진'에서 생존한 3명의 수녀는 본국으로 추방됐다가 1954년 2명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증언은 '귀양의 애가'란 수기로 남았다.
 
‘죽음의 행진’ 때 사용했던 나무 바늘.
‘죽음의 행진’ 때 사용했던 나무 바늘.

재판관 일행은 봉쇄 구역 내 '메히틸드 나무'로 안내받았다. 1950년 3월 25일 수도원 설립 10주년을 기념해 심은 나무다. 당시 창립자 수녀 5명을 기념해 심은 나무는 각각 '사랑' '기쁨' '자비' '통고(痛苦)' '평화'로 이름 붙였다. 1963년 수도원이 혜화동에서 수유동으로 이전하면서 나무도 옮겨왔다. 수녀들은 다양한 자료와 함께 나무를 깎아 만든 길이 5㎝ 남짓 바늘 한 개를 일행에게 보여줬다. '죽음의 행진'에 끌려가던 마리 앙리에트 수녀가 동료 사제와 수녀, 미군 포로 등의 옷을 꿰매주던 바늘이다.

봉쇄 구역 안 정원으로 재판관 일행을 안내하던 골롬바 원장 수녀는 "봄이 오고 꽃이 피면 아름다운 꽃밭이 된다"고 했다. 이 말을 받아 유 주교는 "수녀님들이 바로 꽃"이 라며 "북한 지역에 복음 선포의 씨앗이 될 수 있도록 수녀님들이 기도해달라"고 했다.

'시복 법정'은 지난주 서울대교구의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직자 묘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등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였다. 앞으로 5~7월 춘천·제주·대전교구 시복 대상자에 대한 심사를 갖는다. 모든 자료는 국내 예비 심사법정 종료 후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하게 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08/201903080015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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