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하노이 비행기로 4시간 거리를 열차로 50~60시간 달려
베이징 안 들르고 톈진 거쳐 정저우로… 출발 사실 공개 파격도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차 미·북 정상회담 참석을 위해 '특별 열차' 편으로 지난 23일 오후 평양을 출발했다고 24일 북한 매체들이 보도했다. 김정은은 이후 50~60시간에 걸쳐 중국 대륙을 열차로 종단(縱斷)해 중국·베트남 접경지까지 이동할 것으로 보인다. 하노이까지는 약 4500㎞에 이르는 장거리다. 전용기인 '참매 1호'로 4시간이면 충분할 거리를 굳이 열차로 이동하는 것을 두고 외교가에선 "국제사회의 이목을 쏠리게 해 김정은이 초대형 이벤트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동시에 북·중 밀월을 미국에 과시하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 매체 등에 따르면 김정은은 23일 오후 4시 30분쯤 평양에서 전용 열차에 탑승했다.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포함해 김영철 통일전선부장, 리수용 외무상, 노광철 인민무력상 등 당·군의 주요 간부들이 김정은을 수행했다. 무려 20량에 이르는 특별 열차는 이날 밤 9시 30분쯤(현지 시각) 북·중 접경인 단둥(丹東)역을 통과했다. 김정은이 김여정과 함께 특별 열차에서 내려 쑹타오(宋濤)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으로 보이는 남성과 포옹한 뒤 중국 측 관계자들과 악수하는 장면도 포착됐다. 앞서 김일성 역시 1958년 1차 베트남 방문 때 중국까지 열차를 통해 이동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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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3일 오후 평양역에서 미·북 정상회담이 열리는 베트남 하노이로 출발하기에 앞서 취재진에 둘러싸인 채 고위 간부들의 환송을 받고 있다. 오후 4시 30분 출발한 김정은 특별열차는 이날 밤 단둥, 24일 오후 톈진을 통과했다. 총 50~60시간에 걸쳐 중국 대륙을 종단해 중국·베트남 접경지까지 이동할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북한은 이날 김정은의 열차 탑승 소식과 함께 그간 주민에게 알리지 않았던 미·북 정상회담 개최 사실도 전격 공개했다. 국책 연구소 관계자는 "예상치 못한 동선으로 김정은을 향한 주목도를 높이려는 선전술"이라고 했다. 김정은이 시간·경호 등에서 장점이 없는 육로(陸路)를 택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중국과 후원 관계를 과시함으로써 협상 주도권을 쥐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베이징을 들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이날 베이징을 건너뛰고 톈진(天津)에서 베이징 서남쪽 스자좡(石家莊)을 거쳐 정저우(鄭州) 방면으로 남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 소식통은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베이징에서 시진핑 주석을 만나지 않고 중국과 베트남 접경으로 가는 최단 노선을 따라 남하하는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베트남 방문 수단으로 '열차'를 선택한 건 상당한 파격이라는 게 북한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번 결정으로 항공편을 이용하면 4시간이면 될 김정은의 이동 시간은 50~60시간으로 늘어났다. 그간 북한 최고 지도자는 경호 등을 이유로 외국 방문 시 전용 열차를 이용했지만, 꼬박 2~3일을 한 열차로 이동하는 건 경호 면에서도 결코 유리하지 않다. 그래서 이번 열차 이벤트가 미·북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인 비핵화 문제보다 행사와 의전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의도가 담겼다는 지적이 나온다.
 

단둥역 통과하는 김정은 열차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탑승한 것으로 추정되는 열차가 23일 오후 중국 동북부 북한 접경지인 랴오닝성 단둥 기차역을 통과하고 있다.
단둥역 통과하는 김정은 열차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탑승한 것으로 추정되는 열차가 23일 오후 중국 동북부 북한 접경지인 랴오닝성 단둥 기차역을 통과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남주홍 경기대 교수는 "동선 등 '의전'에 이목이 쏠리게 해 더욱 중요한 '의제'는 관심에서 멀어지게 만들려는 전술로도 보인다"고 했다. 실제로 그동안 미·북 간 의제 협상은 진전이 별로 없고, 정상회담 장소와 부대 행사에만 관심이 집중됐다.

김정은의 깜짝 '열차 방문'은 중국 당국의 전폭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 김정은의 '특별 열차'가 지나는 지역은 경호를 위한 교통 통제, 무더기 완착과 운행 중단이 불가피하다. 실제로 25일 김정은의 열차가 지날 것으로 보이는 창사(長沙)~난닝(南寧)~핑샹(憑祥) 구간은 운행 중단 공고가 잇따랐고,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에선 '한 사람을 위해 13억이 길을 내줬다'는 불만들이 터져 나왔다. 철도가 가장 붐비는 중국의 춘제(春節·중국의 설) 기간에 김정은에게 '대륙 종단'을 용인한 건 지난해부터 강화된 '북·중 친선' 분위기가 반영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정은의 동선(動線) 자체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모종의 메시지라는 분석이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미국과의 협상을 앞두고 북·중 관계를 과시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김정은이 경유하는 주요 도시마다 중국 고위 인사들과 만나는 장면을 연출할 수도 있다. 김정은은 실제 단둥에서 쑹타오 중국 대외연락부장을 만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월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의 방미(訪美)를 앞두고 김정은이 4차 방중으로 협상력을 높였듯 이번에도 '우리 뒤에 중국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김정은 하노이 방문, 김일성과는 다른 길

조영기 국민대 초빙교수는 "행사 시작 전부터 김정은을 '주인공'으로 만들겠다는 의도"라고 했다. 김정은의 '열차행'은 할아버지인 김일성이 1958년 베트남 1차 방문 때 이용했던 경로와 일부 겹친다. 당시 김일성은 평양에서 열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출발했고 우한(武漢), 광저우(廣州) 등에서 중국 지도부와 회동했다. 광저우에서 항공편으로 하노이까지 이동했다. 한 북한 전문가는 "김정은이 '인민을 위해' 평양부터 열차로 장거리 노정에 나섰다는 점을 홍보할 것"이라며 "김일성과 동선이 겹치는 것도 선전용"이라고 했다.

실제 이날 북한 매체들은 김정은 출발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당과 정부, 무력 기관의 간부들은 경애하는 최고 영도자 동지께서 제2차 조·미(북·미) 수뇌 상봉과 회담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고 안녕히 돌아오시기를 충심으로 축원했다"고 했다. 김정은이 한참 이동 중인 시점에 북한이 그의 출발 사실을 공개한 건 상당히 이례적이다. 북한은 신변 안전 등을 우려해 최고 지도자가 목적지에 도착하거나 아예 북한으로 돌아온 이후에야 해당 사실을 보도해왔다.

김정은은 25일 창사(長沙), 난닝(南寧) 등을 통과해 26일 오전 중국 국경과 가까운 베트남 랑선성 동당역에 도착할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하노이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할 것으로 알려졌다. 베트남 당국은 동당역 인근의 경호를 강화하고, '꽃 장식' 등 손님맞이 준비를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정은의 경호팀 100여명도 이날 북한 고려항공편을 통해 베트남으로 입국했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김정은이 비교적 일찍 평양에서 출발했다는 점과 25일 자 중국의 열차 운행 중단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 하면 도중에 항공기로 갈아탈 가능성은 작다는 분석이다. 현지 소식통들은 "비행기로 움직인다면 시간 여유가 생기는 만큼 중국 내 도시에서 시찰에 나설 수도 있지만 관련된 움직임이 없다"고 말했다. 대북 소식통은 "김일성은 과거 베트남 일정이 끝나고 중국 항공편을 이용해 중국 도시 곳곳을 시찰했는데, 김정은도 귀국 중 시진핑 주석 등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5/20190225002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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