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前정부 '위안부 합의' 관여했던 정무2공사도 문책성 소환
징용 배상·레이더 논란 등 악재 쌓이는데 조율할 실무진 공백
 

정부가 주일(駐日) 한국 대사관에서 일하는 고위 공무원을 2015년 박근혜 정부 당시 '위안부 합의'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최근 인사 조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일 관계가 악화 일로인데도 외교 현장에서 대일 외교를 담당하는 인사를 전(前) 정부 때의 일로 소환한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다. 23일 주일 한국 대사관에 따르면 국정원에서 파견된 정무2공사 A씨가 22일 문책성 인사로 귀국한 것으로 확인됐다. A공사는 박근혜 정부가 한·일 위안부 합의를 맺을 당시 국정원에서 일본 업무를 담당했었다.

위안부 재단 해산과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일본 초계기에 대한 레이더 논란 등으로 양국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대일 외교 관계자가 현장에서 배제된 것이다. 하지만 외교부 당국자는 "국정원으로부터 A공사의 본국 소환에 대해 통보 받지 못했다"고 했다.

이에 앞서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낸 추미애 의원은 지난 10월 주일 대사관 국정감사에서 A공사를 일으켜 세운 후 "(국정원) 위안부 TF의 일원이었던 사람이 일본에 나와서 공사로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나. 그러면 모순 아니냐"며 인사 조치를 요구했다. 이수훈 주일 대사가 난색을 표명하자 추 의원은 "다른 나라의 공사로 간다면 상관없을 것 같다"고 했다. 추 의원은 이어 같은 달 서울에서 열린 외교부 국정감사에서도 다시 A공사에 대한 인사 조치를 요구했다. 도쿄의 한 소식통은 "A공사가 이후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APEC서도 대화없이…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파푸아뉴기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거리를 둔 채 행사장에 들어서고 있다.
APEC서도 대화없이…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파푸아뉴기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거리를 둔 채 행사장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현 정부 들어 '대일 외교 라인 수난사'는 계속되고 있다. 전 정부에서 대일 외교를 담당해온 인사들은 '한·일 위안부 합의' 후폭풍으로 하나씩 현장에서 물러나고 있다. 한때 '워싱턴 스쿨'과 양대 산맥으로 분류됐던 '재팬 스쿨'이 '초토화됐다'는 말까지 나온다. 한국 상황에 정통한 일본의 외교 소식통은 "일·한 관계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이유로 적폐 인물로 찍혀서 좌천되는 것은 물론 수사 대상이 된다면 누가 열심히 일하겠느냐"며 "양국 간 현안을 조율할 라인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했다.

한편 일본 방위성은 22일 보도 자료를 내고 우리 해군 구축함 광개토함이 조난한 북한 어선을 찾기 위해 사격 통제용 레이더를 가동하다가 일본 초계기를 겨냥한 것에 대해 "어선 수색에는 수상 수색 레이더를 사용하는 것이 적당하다"며 이틀째 반발했다. 이에 대해 우리 군은 "어선 수색 활동에 일본이 과민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반박했다.
 

광개토대왕함 MW08 그래픽

'대일 외교 라인'에 대한 이해하기 어려운 인사는 연초부터 계속됐다. 한·일 위안부 합의 때 실무 협상을 맡았던 이상덕 전 외교부 동북아국장은 전 정부에서 싱가포르 대사로 임명됐지만, 지난 1월 귀임 조치됐다. 외교부는 "개인적 사유"라고 밝혔지만, 외교가에선 "위안부 합의에 대한 사실상 문책성 인사"라는 말이 나왔다.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일본 국가안전보장국 국장 간의 협의를 실무 지원했던 김옥채 전 주일 공사도 후쿠오카 총영사로 일하다가 올해 교체됐다. 약 4년간 주일 정무공사로 일하면서 한·일 위안부 합의 등의 실무를 총괄하다가 지난 10월 귀국한 외교관 L씨는 아직 보직을 받지 못하고 있다. 무보직 상태가 해를 넘겨 내년 초까지 계속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위안부 합의 당시 청와대에서 근무했다가 주일 대사관에 부임한 다른 외교관 L씨(현 주일 경제공사)도 추미애 민주당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문제를 제기하며 조만간 인사 이동될 것이라는 얘기가 돌고 있다. 외교부는 "인사 조치는 당시 합의와는 관련 없다"는 입장만 반복하고 있다.

검찰은 지난 8월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재판 거래' 의혹을 수사한다며 이례적으로 외교부를 압수 수색했다. 특히 검찰은 외교부 국제법률국, 기획조정실 등과 함께 대일 외교 주무 부서인 동북아국을 뒤졌다. 개인 비리가 아닌 외교 사안에 대한 외교부 압수 수색은 역대 처음이다. 그나마 몇 안 되는 외교부 내 일본 전문가들은 "지금 국면에서 무슨 말을 하겠느냐"며 현안에 대해 아예 입을 닫고 있다. "한일관계가 이렇게 가면 안된다는 걸 알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고도 했다.

이에 따라 주일 대사관 근무는 '기피 대상'이 되고 있다. 외교부는 얼마 전 내년 주일 대사관에서 근무할 외교관 3명을 모집했지만 신청자가 없었다. 외교부 창설 이래 처음이었다. 외교부는 재모집을 통해서야 부임할 외교관을 겨우 확보했다. '미래의 대일 외교 라인' 육성마저 차질을 빚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재팬 스쿨'의 몰락은 꼬여가는 한·일 관계 해결을 어렵게 하는 물론 향후 중대한 '외교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외교부는 최근 동북아국에서 중국국을 분리하는 방안도 추진중이다.

양국 간에 악화된 한·일 관계를 해결하려는 노력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지난달 중순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와 아·태경제협력체(APEC) 회의에서 잇달아 만났지만 간단한 인사만 했다. 이어서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G20회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양국 정상이 서로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아베 총리는 이달 중순 서울에서 열린 한·일 양국 의원연맹 합동 총회에 축사(祝辭)도 보내지 않았다.

일본 외무성의 고위 관계자는 지난 20일 브리핑에서 내년 6월 오사카에서 열리는 G20회의 전에는 한·일 정상회담을 준비하지 않고 있음을 시사했다. 일본은 우리 정부가 내년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규모의 기념행사를 준비 중인 것에 대해서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부는 3·1운동 관련 행사를 주일 대사관을 비롯, 전 세계 약 50개 공관에서 연다는 계획이다. 아베 내각은 이런 일련의 행사가 자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한·일 외교 당국은 24일 강제징용 판결 이후 처음으로 외교부 국장급 협의를 갖고 대응책을 논의키로 했다. 하지만 이번 '초계기 레이더 조준' 사태로 양국 간 협의가 쉽지 않아진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이번 일이 양국 간 외교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일본 고노 다로 외무상은 "24일 한·일 외무성 국장급 협의에서 이번 레이더 문제에 대해 한국 측의 적절한 대응을 요구할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는 건 한반도 주 변 정세나 북핵 해결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신각수 전 주일 대사는 "한·일 관계는 이미 나빠질 만큼 나빠진 상태다. 더 이상 부정적인 이슈가 늘어나면 한·미·일 안보 협력에 당장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이대로 한·일 관계를 방치해선 안된다"며 "한·일 간 다시 신뢰를 구축하려는 노력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2/24/20181224002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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