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석조 국제부 기자
노석조 국제부 기자

이란 화폐 '리알'의 모든 지폐 앞면엔 긴 수염을 늘어뜨린 한 노인의 초상화가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 1979년 민중 봉기를 일으켜 친미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반미(反美) 이슬람공화국을 세운 루홀라 호메이니이다. 타계한 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혁명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그이지만 요즘만큼 면이 안 서는 때도 없을 것이다. 본인 얼굴이 그려진 리알화(貨) 가치가 날이 갈수록 추락하고 있어서다.

2012년 달러당 2만리알에 거래되던 리알화는 2016년 5만리알까지 치솟았고 올 11월엔 15만리알을 찍었다. 화폐 가치가 2년 만에 3분의 1 토막이 났다. '신(神)의 대리인'이라는 호메이니도 석유·천연가스 생산 대국(大國)인 이란 경제가 이렇게 주저앉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페르시아 상인의 후예인 이란을 이렇게 초라하게 만든 건 미국의 제재다. 미국은 한때 핵 시설을 지어줄 정도로 이란을 전폭 지원했지만, 1979년 이란 학생들이 테헤란 소재 미 대사관을 점거하자 '채찍'을 들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발령해 이란의 미국 내 자산 120억달러(약 13조5000억원)를 동결한 것이다. 이후 미국은 30여년간 핵 개발 등을 문제 삼아 각종 제재를 가했다.
 
 
변곡점은 2015년 찾아왔다. 미·이란이 핵 협상을 전격 타결했다. 미국에선 전례 없이 이란에 우호적인 오바마 대통령이, 이란에선 유럽 유학파로 개혁 성향인 로하니 대통령이 집권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약속대로 2016년 1월 이란 제재가 풀렸다. 글로벌 기업들이 이란 시장에 대거 몰렸다. 하지만 2년10개월 만인 이달 5일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 제재를 다시 풀가동했다. 오바마 핵 합의에 이란의 탄도미사일 개발 제한 조항은 없는데, '이란 핵 개발을 10년간만 동결하고 그 후의 개발은 용인한다'는 '일몰(日沒)' 조항이 들어간 점을 문제 삼아 합의를 파기한 것이다.

제재 재개로 글로벌 기업들은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이란에서 발을 빼고 있다. 경제적 이익 때문에 핵 사찰을 수용했던 이란의 노력은 일거에 물거품이 됐다. 이제 어느 나라·기업도 쉽사리 돈뭉치를 들고 이란으로 달려가진 않을 듯하다. 정권에 따라 외교 합의문 정도는 언제든 휴지 조각이 될 수 있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이란이 핵·미사일 기술을 북한과 공유하며 이를 함께 개발해 온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북한은 극심한 재정난에도 지난해 이란에 한국 대사관보다도 큰 대사관을 새로 지어 올렸다. 그만큼 밀접한 관계라는 것이다. 북한은 '이란 케이스'를 학습해 진짜 핵 합의 생각은 일찌감치 접고 공갈·협박 같은 교묘한 협상을 통해 '제재 완화' '경제 협력' 같은 떡고물 챙길 궁리만 하는 게 아닐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27/20181127033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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