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공산주의 사회 건설 첫 대중운동
사상개조 초점…문화예술계 인사 비판


광복 후 첫 중앙정권기구로 등장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1946년 봄부터 가을까지 「민주개혁」이라는 이름아래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국유화 등 일련의 공산화 개혁조치를 단행해 북한은 사회주의 사회를 향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전반적인 사회분위기와 정서는 새로운 환경과 질서에 부응하지 못한 채 과거의 인습과 생활방식에 깊이 침잠해 있었다.

1946년 말 일제 식민잔재와 봉건유제(遺制) 청산, 새 사회 건설을 기치로 닻을 올린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은 이런 괴리와 불일치를 걷어내고 새로운 사회기풍을 진작시키기 위한 북한의 첫 대중운동이었다.

북한은 1946년 11월 25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제3차 확대위원회를 열고 건국사상총동원운동 추진 방침을 결의했다. 사흘 뒤인 28일에는 북로당 중앙위원회 제3차 회의와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 제14차 회의를 잇달아 열어 구체적인 추진방도를 토의, 결정했다. 이에 따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2월 건국사상 선전의 내용과 형식, 방법 등을 담은 「건국사상총동원 선전요강」을 발표하고, 그 전위대 역할을 수행할 건국사상총동원공작대를 발족시켰다.

각 정당·사회단체에서 선발된 인원으로 구성한 공작대는 산하에 공작반을 두고 시·군 단위로 활동했다. 이들은 강연회·해설담화·좌담회·연예활동 등을 통해 구습타파와 건국사업의 「당위성」을 선전하는 사상개조에 초점을 맞춰 운동을 선도했다. 이어 당·정권기관·사회단체·공장·기업소·농촌 등 모든 부문·단위로 운동이 확산되면서 전체 사회가 연일 사상검토와 사상투쟁의 물결에 휩싸였다.

이 과정에서 이기주의·향락주의·관료주의·무사안일·부화방탕 등 부정적 현상들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색분자·건달꾼의 오명을 쓰고 현직에서 쫓겨나거나 지방으로 추방됐다. 일례로 문화예술분야에서 벌어진 반동적 부르주아 사상여독 청산을 위한 사상투쟁에서는 「응향」 「문장독본」 「예원써클」 등의 작품이 퇴폐적이고 현실도피주의적이며 예술지상주의를 전파하는 반동작품으로 낙인돼 비판의 뭇매를 맞았다.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은 구시대의 낡은 사상잔재를 발본색원하기 위한 사상개조운동과 새로운 경제·문화 건설을 위한 애국적 실천운동의 성격을 병행, 추진됐다. 1946년 12월 평북 정주기관구 철도 노동자들과 황해도 재령군 농민들이 지핀 애국운동과 애국미헌납운동은 대표적 사례로 지적된다.

정주기관구 노동자들은 종래 기관차 연료로 사용할 수 없다던 안주탄(炭)으로 기관차를 움직이는데 성공함으로써 애국운동의 선봉에 섰으며, 재령군 농민 김재원은 토지개혁을 통해 분배받은 땅에서 거둔 30가마니의 쌀을 「애국미」로 헌납함으로써 「애국미헌납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김재원이 바친 애국미는 나중에 김일성종합대학과 만경대혁명학원 교사(校舍)를 짓는데 쓰여졌다.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은 간부들과 노동자·농민들의 청렴운동, 절약운동·증산운동 등 각 부문운동으로 이어지면서 1940년대 후반 북한사회를 뜨겁게 달궜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