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폐기 실질 진전은 이번에도 없었다
이러다 북핵 문제는 모두가 알면서도 침묵하는 문제 될 것
 

양상훈 주필
양상훈 주필

남북 정상회담에서 혹시나 했던 기대는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북핵 폐기라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4월 남북 정상회담, 6월 미·북 정상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합의문 뒷부분으로 밀려났고 그 내용도 뜻이 모호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식의 수사(修辭) 반복에 그쳤다. 이동식 발사대 확보로 쓸모없어진 미사일 시험장 폐기와 이미 고철화됐다는 영변 핵시설에 대한 조건부 폐기 의사도 실질적 핵탄두·핵물질 폐기와는 상관없다. 북핵 폐기가 되려면 다른 무엇보다 핵폭탄과 핵물질, 우라늄농축시설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신고해야 한다. 그래야 폐기가 되고 검증이 된다. 그런데 김정은은 이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핵 신고'에 대한 간접적 언급이라도 있을까 기대했지만 없었다.

필자는 김정은이 핵을 포기할 의사 자체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이 틀렸으면 좋겠다. 그런데 틀리는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라 그 반대 조짐만 나온다.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은 역사적 사례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세계 역사상 핵실험에 성공해 핵폭탄을 확보한 나라 중에 핵을 포기한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

우크라이나가 핵을 포기한 것은 그것이 자신들이 개발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 소유였기 때문이다. 지금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공격을 받은 뒤 핵 포기를 후회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핵실험까지 가지 못했다. 나머지 미·영·프·중·러 5국과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은 핵을 포기하지 않았다. 북한은 이 나라들보다 훨씬 더 큰 대가를 치르고 핵폭탄을 갖게 됐다. 핵폭탄 숫자도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을 능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은은 이라크 후세인과 리비아 카다피가 핵폭탄이 없어서 죽었다고 믿고 있다. 후세인은 실제 그런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에 단 한 차례도 핵 포기 사례가 없었다면 앞으로도 일어날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북핵과 장사정포가 위협이다. 김정은에게는 같은 민족인데도 훨씬 더 잘사는 한국이란 나라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본질적 위협이다. 한국의 존재 자체를 무력화하려면 핵으로 깔고 앉는 것 외엔 다른 길이 없다. 그런데 왜, 어떻게 김정은이 핵을 버리나.

김정은이 핵을 버리는 것은 안 버리면 죽게 될 때뿐이다. 그런데 중국과 러시아는 대북 제재를 노골적으로 방해한다. 한국 정부도 속마음은 중·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전문가들은 국제사회가 일치단결해도 제재 강도가 철저하게 지켜지는 기간은 2~3년 정도일 것이라고 본다. 그 기간 이상 끌고 가려면 미국의 결연한 의지와 치밀한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초등학생 수준의 행태를 보인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핵 사찰 얘기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트럼프는 '김정은이 핵 사찰에 합의했다'고 트윗을 날렸다. '핵 사찰'이 뭔지 모르거나 합의문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다. 매사가 이런 식이다. 지금처럼 김정은이 트럼프를 계속 치켜세워 주면 미국의 대북 제재도 '말'로만 남는 상황이 온다.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는 문제를 '방 안의 코끼리'라고 한다. 이대로 가면 김정은이 핵폭탄을 갖고 있고 그것이 심각한 위협이란 사실을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문제 제기하지 않고 못 본 척하는 상황이 온다. 중·러는 이미 북핵을 방 안의 코끼리처럼 대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코끼리에게 밥 주는 데 더 관심이 있다. 트럼프는 김정은이 더 이상 도발하지 않으면 북핵 해결에 점점 흥미를 잃고 코끼리가 있는 방에서 나가버릴 것이다.

지금 미국 사회에선 일부이지만 눈여겨봐야 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북핵을 막을 수 없을 바엔 북한이 인도나 파키스탄처럼 책임 있는 핵보유국이 되게 하는 것이 낫다는 주장이 시작된 것이다. 김정은은 핵의 일부만 신고한 뒤 그것에 대한 검증 시비로 시간이 기약 없이 흘러가게 할 수 있다. 한국 사회 안에서도 북핵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기를 싫어하고 북핵 얘기하는 사람을 남북 화해 반대자, 평화 반대자로 비난하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김정은 핵은 명실상부하게 방 안의 코끼리가 된다.

코끼리와 사람이 방 안에서 동거하게 되면 사람 생각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사람이 코끼리를 없는 것으로 치든 말든 코끼리가 움직이거나 배가 고프면 그것이 실존적 위험이다. 사람들은 코끼리가 일어서면 놀라 피할 뿐 어쩌지 못한다. 이들이 가장 믿는 것은 늘 그랬듯이 '설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9/19/2018091904055.html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