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성
/99년 탈북·홍익대 산업디자인과 재학.

내 고향은 평안남도의 작은 산골이다. 아버지는 평생 광산 노동자로 고지식하게 사신 분이다. 어머니 역시 그런 아버지에게 순종적이고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외아들인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발육도 뜨고 몹시 약골이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너는 육체노동은 할 수 없으니 하급 사무원이라도 되려면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내 공책에는 수학문제가 아닌 만화그림만 가득 그려지곤 했다. 공책 검열을 받을 때면 선생님들에게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른다. 욕을 먹고 매를 맞으면서도 그림이 좋았다. 그림을 그리노라면 어느덧 마음이 즐거워지는 것이었다. 훌륭한 풍경화가가 되리라고 꿈꾸었다. 제대로 미술교육을 받아봤으면 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소원이었다.

미술교육은 평양이나 도(道)소재지에 가야 그나마 가능한 일이었다. 산골 소년인 내게 미술대학에 들어간다는 것은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군(郡) 문화회관 미술원들을 따라 다니면서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우거나 스스로 연습했다.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림을 제대로 그리려면 사람의 골격을 그려봐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친구들과 함께 밤에 공동묘지에 올라가 해골을 주워다 그리기도 했다.

우연히 질 좋은 종이 한 장이라도 생기면 금덩어리보다 반가웠다. 검은 종이와 질 나쁜 연필에다 재생 고무병마개 뚜껑으로 지우개를 대신했지만 그래도 마냥 좋았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산기업소에 소속된 미술원이 되었다. 선전화(포스터)나 우상화(偶像畵)를 그리거나 구호가 담긴 대형 간판들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일이었다.

내 성에 찰 리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道) 미술창작사에서 운영하는 강습소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아버지가 30년 광산노동으로 남긴 유일한 재산인 흑백 텔레비전을 내놓고서야 가능했다. 자식교육에는 무엇이든 아끼지 않으시던 어머니마저 『아버지 인생에 그것 하나 남았는데…』하시며 나를 만류하셨다. 끝내 내가 이겼다.

봄과 가을에 한 달씩 두 번에 걸쳐 진행되는 강습소 수업을 듣기 위해 기차가 제대로 다니지 않을 때는 300리 길을 걷기도 했다. 여관에서 빈대에게 뜯기고 강냉이밥에 소금국을 먹으면서도 그림을 배운다는 것만으로 마냥 행복했다. 그런데 도 미술창작사마저 경제사정으로 문을 닫는 것이었다. 겨우 2년을 다녔을 때였다. 그 허탈감과 좌절감이란.

28년을 북한에서 살다 나왔다. 결혼해 아들이 생겼을 때 더는 탈북을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춘시절 몸과 마음을 바쳐 우상화 선전의 일선에서 보냈으나 남은 것은 무엇인가. 만학(晩學)의 미술학도가 되어 캠퍼스를 오가는 한국 대학생들을 보고 있노라면 회한이 밀려온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이곳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내 꿈은 여기 한국에서 이루어졌고, 마치 그것이 현실이 아닌 듯해서 자꾸 두려운 생각이 든다. 이 나라 건설에 돌멩이 하나 얹은 바 없는 나를 안아준 대한민국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모른다.
(※필자의 요청으로 사진은 게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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