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80이 넘어 조국에 돌아갈 수 있을까요. 꿈에나 보고 죽었으면…. ”

베이징(북경) 자금성 동편 난츠쯔(남지자) 둥화먼(동화문)가의 한 골목길. 중국 전통 사합원(사합원)의 4평짜리 단칸방에 조선족 동포 차순화(차순화·83) 할머니가 살고 있다. 35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에도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부채 하나로 더위를 쫓고 있다.

할머니가 중국으로 건너온 지 60여년. 파란만장한 한·중(한·중) 현대사의 풍파를 겪으며 힘든 삶을 견디고 있는 것은, 조국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한 가지 열망 때문이다.

1917년 평양에서 태어난 차 할머니는 정신여자학교를 졸업하고, 두 명의 이모와 함께 일본 다이고쿠(대국) 음악학교에 유학을 갔다가 당시 일본 최고의 남자배우 치요다 가쓰타로(천대전 승태랑)와 만나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고향 평양에 돌아온 뒤 “평양 남쪽으로는 절대 가지 말라”는 어머니의 청에 따라 지인(지인)이 있는 베이징으로 온 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했다. 이곳에서 식당일과 일본어 교습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동포 의사 남준구(남준구·작고)씨를 만나 결혼했다. 44~45년 그들이 살던 베이징 둥단(동단)에는 조선협회가 있었고, 자연스럽게 독립운동가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45년 3월에는 김은충 선생의 독려로 남편과 함께 김구(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마지막으로 입당했다.

또 이때를 전후해 선양(심양) 등지로 독립자금이나 무기를 날라주는 힘든 일을 맡기도 했다고 차 할머니는 회고했다. 48년 8월에 인천을 통해 서울로 들어온 할머니는 김은충 선생의 소개로 경교장에서 김구 선생을 만났다.

하지만 48년 11월 재산 정리를 위해 다시 중국으로 들어간 할머니는 49년 1월 말 베이징이 공산당군에 떨어지면서 발이 묶여 버렸다.

50년 북한대사관이 베이징에 들어오자 중국 정부는 외국인에게 국적 선택을 강요, 할머니는 할 수 없이 조선(북한) 국적을 선택했다. “그때는 한국대사관도, 일본대사관도 없었지. 그렇다고 중국인이 되기는 싫었고. ” 공산화 이후 집을 몰수당하고 남편이 투옥되자, 할머니는 11년간 남편 옥바라지를 하며 무진 고생을 했다. 추운 겨울에 음식을 지어 나르느라 손마디에 류머티즘이 생겨 지금도 손가락 마디가 불룩 튀어나와 있다. 출옥한 남편은 70년 북한을 다녀오겠다며 갔다가 의사가 부족한 그곳에 억류돼 나오지 못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는 ‘모(모)주석을 욕한 죄’로 2년 9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할머니는 몇 년 전 한국 입국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주중 한국대사관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국적이 북한이어서 방법이 없다’는 대답만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또 일찍이 헤어진 오빠 차순원(92세)과 여동생 차순복(74세), 그리고 조카 차상열(67), 차상미(63·여)를 찾기 위해 한국 방송국에 편지도 보냈지만 아무런 답장을 받지 못했다. “남·북한이 손을 잡는 마당에 나 같은 늙은이 하나 한국에 보내줄 수는 없을까. 한국과 북한과 중국이 도장만 찍으면 될텐데…. ”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가 할아버지들이 묻혀 있는 조국 땅에 돌아가 묻히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며 힘겹게 부채를 움직이는 할머니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북경=지해범기자 hbjee@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