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 대통령이 오는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개최하기로 했던 미·북 정상회담을 취소했다. 다음 날짜를 정하지 않은 무기 연기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북한이 우리와 정상회담을 요청했다고 전달받았고 나는 당신과 만나기를 고대했지만 최근 당신이 공개적으로 드러낸 분노와 적개심에 비춰볼 때 이 시점에서 회담을 갖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에게 "당신은 당신의 핵 능력에 대해 말하지만 우리의 핵 능력이 훨씬 강력하다"면서 "우리가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게 되길 바란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에게 "언젠가는 만나기를 고대한다"면서 "생각이 바뀌면 주저 말고 알려 달라"고 했다.

순항하는 듯하던 미·북 정상회담에 이상 기류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김정은이 중국 시진핑과 두 번 만난 이후 남북 고위급 회담을 돌연 취소하면서 미·북 정상회담 취소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부터다. 북한이 미국의 선(先) 핵폐기 요구에 반발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22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일괄적인 핵폐기가 물리적으로 어려울 수도 있다"고 했고 24일 폭스 뉴스와 인터뷰에선 "단계적인 비핵화 방식이 어쩌면 필요할 수도 있다"고 했다. 어떻게든 북한을 달래서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보려는 성의를 보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월 우리 특사단이 미·북 정상회담을 갖자는 김정은의 제안을 전달했을 때 참모진들과 상의 과정도 거치지 않고 즉각 수락했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미치광이라고 불렀던 김정은에 대해 "고귀하다(honorable)"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회담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공을 들여왔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이란과 맺었던 핵 협정을 깨는 대신 오바마 전 대통령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북한과 핵 협상을 성공시켜 차별화하겠다는 의욕도 보여 왔다.

그랬던 트럼프 대통령이 급작스럽게 정상회담을 열지 않기로 결심한 배경이 무엇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보낸 편지만 봐서는 북한 측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존 볼턴 안보 보좌관을 강력하게 비난한 데 이어, 최선희 외무성 미국 담당부상이 핵전쟁을 시사하면서 펜스 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난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듯하다. 북한이 중요한 협상을 앞두고 상대방을 막말로 비난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이런 북한의 행태에 익숙지 않은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모욕적이라고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편지에서 "북한이 먼저 우리에게 정상회담을 요청했다고 전달받았다"고 지적한 것은 "그래 놓고 왜 우리에게 적개심을 보이느냐"고 북한에 지적하는 동시에 그 요청을 전달했던 우리 측을 향해 책임을 묻는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표면적으로는 북한의 적대적 태도를 문제 삼았지만 실제는 비공개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미·북 간 접촉에서 북핵 폐기를 둘러싼 입장 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요구하는 단계적인 비핵화를 부분적으로 수용할 의사를 비췄지만 북한이 과거 25년간 해온 대로 단계별로 대가를 챙기는 방식을 고집했을 경우 이 상태로 정상회담을 갖기는 곤란하다는 판단을 내렸을 수 있다.

6월 12일 미·북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가 핵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던 온 국민의 기대는 일단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과의 추후 협상 가능성을 열어 놓은 만큼 기회의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김정은이 깨끗하게 핵을 버리고 남북 공영의 길로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더 강력한 대북 제재와 미국의 군사 압박밖에 없다. 최근 보인 북의 이상행동들은 도저히 핵 포기를 결단한 것으로 볼 수가 없었다.

당장 시급한 것은 한·미 간의 굳건한 공조다. 앞으로 김정은이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른다. 크게 흐트러진 안보 태세부터 재점검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핫라인으로 김정은에게 다시 한 번 핵 포기 결단을 촉구할 필요도 있다. 북 비위만 맞춰서 될 일이 아니다. 비상한 안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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