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천 칼럼] 한미FTA 재협상에서 선방했다고?


2008년 4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미 상공회의소 주최로 열린 ‘CEO 라운드 테이블’에서 갑자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전 대통령이 “한미 FTA의 걸림돌이 됐던 쇠고기 문제가 합의됐다는 전화 보고를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으로부터 받았다”고 밝힌 직후였다.

이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 ‘한미FTA가 반드시 체결돼야 한다’는 강한 집념을 보여주고, 또 지지를 보내줬기 때문에 합의가 됐다”며 한껏 고무된 모습이었다고 한다. “양국 대표들이 어젯밤에 한숨도 안 자고 밤을 새서 협상을 했다고 들었다”며 “새벽에 두 사람이 잠결에 합의한 것 같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양국 정부의 공식 발표가 나오기 전에 대통령이 먼저 쇠고기 협상 타결 소식을 전한 것은 적절치 않았다. 더욱이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타결을 서두른 탓에 논란의 소지가 많았다. ‘한미FTA의 걸림돌’이라는 표현과 함께 우리측 수행원들이 박수를 유도한 사실도 시빗거리가 됐다.

그래서 이 전 대통령의 기대와는 달리 쇠고기 문제는 오히려 한미FTA 비준동의안을 처리하는 데 걸림돌이 됐다. 한미 정상회담과 FTA 비준을 위해 섣불리 쇠고기 시장을 열어줬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악의적인 광우병 괴담으로 인해 국내 여론이 더 악화됐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국회에서 FTA 비준동의안이 처리되기까지 3년의 시간이 걸렸다.

당시 정부·여당은 시종일관 한미FTA와 쇠고기 협상은 별개라고 주장했다. 형식적으로만 보면 맞는 말이었다. FTA 협정문 어디에도 쇠고기 시장 개방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하지만 쇠고기 수입 재개는 한미FTA를 위한 4대 선결과제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미국의 주요 관심사였다. FTA와 쇠고기는 사실상 하나의 패키지로 묶여 있었다.

최근 한미FTA 재협상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라이트하이저 미 통상대표부(USTR) 대표는 “한국과의 협상은 철강, 외환, FTA 세 분야에서 이뤄졌다”고 했다. 백악관과 USTR은 “무역과 투자의 공평한 경쟁의 장을 촉진하기 위해 경쟁적 평가절하와 환율조작을 금지하는 데 대한 합의(양해각서)가 마무리되고 있다”는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FTA 재협상과 환율 협의는 전혀 별개”라며 펄쩍 뛰었다. 기획재정부는 “미국의 환율보고서 발표를 앞두고 통상적인 협의가 있었을 뿐”이라며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미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FTA 재협상에서 환율 관련 협의를 하지 않았다는 정부 주장이 맞는다.

하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은 한국이 아닌 미국이다. FTA 재협상 자체가 트럼프 정부의 일방적인 요구에 따른 것이다. 미국이 FTA 재협상과 환율 협의를 한 묶음으로 간주하고 있다면 이를 분리해서 보는 게 더 어색하다. 정부가 FTA 재협상 결과를 발표하면서 환율 관련 협의 사실을 일부러 빼고 숨긴 것 아니냐는 의심이 제기될 만하다.

환율 뿐만 아니라 FTA 재협상 결과에서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정부·여당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국익을 지키고 선방했다”며 자랑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거란과의 담판을 통해 강동 6주를 얻어낸 고려 장군 서희의 외교 성과에 비유하기도 했다. 청와대도 “지독하게 협상하면서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다”고 협상팀을 치하했다.

하지만 해외에선 “한국이 너무 쉽게, 너무 많이 양보한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사설에서 철강 수출 물량을 제한하기로 한데 대해 “1980년대의 ‘수출자율규제’로 되돌아간 것”이라고 꼬집었다. “WTO 규정에 위배되기 때문에 또다른 통상 마찰을 빚을 수 있다”고도 했다.

한국이 가장 먼저 트럼프식 억지·왜곡·과장이 먹혀드는 선례를 만들었다는 지적도 있다.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는 한 전투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면 또다른 전투를 시작할 사람”이라고 했다. 한번의 성과로 만족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트럼프 대통령은 원칙적으로 합의했다고 발표한 한미FTA 개정 협상에 대해 “북한과의 협상이 타결된 이후로 그것을 미룰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위대한 합의가 이뤄졌다”고 한지 하루만에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매우 강력한 (협상)카드이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앞으로 또 무슨 문제를 들고 나올지 알 수 없다.

결국 내줄 것 다 내주고 얻은 건 없는 꼴이 되고 말았다. 환율 협의 등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남아 있고, ‘트럼프 리스크’도 해소되지 않았다. 호랑이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하며 슬금슬금 다가오는 상황이 계속 되고 있다. 통상 현안에 대한 정부의 판단력과 외교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과거와 다른 부분이 있다면 이른바 진보 세력의 침묵이다. 이명박 정부 때 나라를 팔아먹은 것처럼 펄펄 뛰며 악다구니를 써댄 것과 딴판이다. 당시보다 한국에 더 불리한 협상을 했는 데도 모른 척 딴전을 피우고 있다. 한미FTA 반대 투쟁의 속셈이 따로 있었다는 이야기다. 참 희한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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