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3500명 구출한 '수퍼맨']

"銃聲이 나고 일어서려니 오른발이 젖은 것 같았다
운동화가 일자로 찢겼고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다"

"태국 루트로 탈출시킬 때 일곱 번의 인계인수 거쳐
안내자는 정말 위험한 직업… 대부분 2년 안에 적발돼"
 

'긴급'이라는 제목의 이런 메일이 종종 날아온다.

〈평창올림픽과 남북단일팀 등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소리 없는 전쟁으로 인해 늘 쫓기고 숨는 것이 일상인 북한 난민들, 혹한의 추위 속에 떨고 있는 이들에 대해선 관심이 멀어지고 있지 않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어젯밤, 탈북한 모녀와 20대 초반의 여성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중략).

세 명의 북한 난민을 구하려면 6백만원가량이 소요됩니다. 이 여성들은 지금 여러분의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불안에서 벗어나 편안히 살 수 있도록 도움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구호금 입금 계좌 및 계좌명: 우리은행 142-097009-01-201 북한인권시민연합〉

이는 북한인권시민연합의 김영자 사무국장이 보내오는 것이다. 그녀는 탈북자 구출을 위해 후원금을 모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중국 선양(瀋陽)을 기준으로 북한 난민 한 명을 데리고 들어오는데 실비로 약 200만원이 듭니다. 우리 단체는 그 경비를 모으는 일만 맡고, 실제 이들을 구출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요. 우리는 그를 '수퍼맨'이라고 불러요. 그는 중국과 북한에 협력자와 조직을 갖고 있어요. 그는 지금까지 3500명쯤 구출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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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맨’은 “한국에 온 탈북자들은 북한 독재 정권의 증언자들”이라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음지(陰地)에서 활동해온 '수퍼맨'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54세의 목사였다.

"이 일은 숨어서 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지금껏 해왔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20년간 왜 이렇게 해왔는지 알릴 필요는 있지 않을까, 그동안 만난 북한 사람 수천명을 통해서 본 독재 정권의 변치 않는 본질을 얘기해줘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북한 체제에 대해 아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정작 너무 모릅니다. 평창올림픽 기간 북한 대표단의 미소와 평화 선전 공세만 봤지 그 뒤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안 보려고 합니다."

그는 신학대를 나왔지만 곧바로 목회자 코스를 밟지 않았다. 대학원에서 전공을 국제경제학으로 바꿨다. 사회에 나와 섬유업체를 운영했고, 1990년대 중반 중국에 진출해 원단 수입업을 했다. 1997년 국내 본사가 부도나면서 사업 기반이 무너졌다고 한다.

"어느 날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때 중국의 옌지, 선양, 다롄의 역전(驛前)에서 떼 지어 다니며 구걸하던 '북한 꽃제비'들이 떠올랐습니다.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아이들은 생존을 위해 중국 땅으로 넘어왔으니까요. 중국 공안은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갔습니다. 하필 죽으려는 순간에 '내 형편이 저 애들보다는 낫지 않은가, 내가 죽었다 치고 저들을 위해 한번 살아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스쳐 간 겁니다."

그는 콩, 참깨, 장뇌삼 등 중국 농산물을 수입하면서 자신의 계획을 추진했다. 거주하던 집을 저당 잡혀 빌린 돈으로 옌지, 선양, 다롄 등에 쪽방을 얻었다. 공안의 단속을 피해 탈북자들이 숨어지낼 수 있는 은신처를 만들어준 것이다. 그가 보호한 탈북자 수는 1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의 아내도 봉제공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도왔다.

"1999년 가을에 옌지(延吉)의 은신처로 한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풍계리 핵 실험장 터널공사에 관여한 기술자였습니다. 자신을 중국 바깥으로 탈출시켜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북한 난민을 보호만 했지 탈출시키는 일은 그때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국 공안이 이곳을 덮쳤습니다. 그를 포함해 4명이 체포됐습니다. 공안에게 뇌물을 줘 두 명은 빼냈지만, 그는 결국 북송됐습니다."

그 사건이 있고서 그는 북한 난민을 탈출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몽골 루트'를 선택했다. 그는 조선족 통역과 함께 탈북자 4명을 환자로 위장시켜 병원에 데리고 가는 것처럼 열차를 탔다. 탈북자들은 한밤중에 국경을 넘어 몽골의 고비사막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첫 번째 탈출은 성공했다.

그는 중국 변경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대대적인 탈북 계획을 세웠다. 몇 주 뒤 탈북자 6명을 다시 데리고 왔다. 낮에 국경 사전 답사를 갔던 조선족 통역과 탈북자가 밤이 돼도 돌아오지 않았다.

"느낌이 안 좋아 나머지 탈북자들에게 다른 곳에 피신해 있으라고 했습니다. 한밤중에 조선족 통역이 전화를 걸어와 '공안에 붙들렸습니다. 사장님이 우리를 구해주세요'라며 울먹였습니다. 그 전화를 받고는 도망갈 수도 없었습니다. 얼마 뒤 공안이 들이닥쳤습니다."

피신했던 탈북자들은 그 뒤 국경을 넘어 몽골로 탈출했다. 그는 '서방의 간첩'으로 몰려 조사받았다.

"좁은 방에서 높은 의자에 앉혀 묶어놓고는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받았습니다. 여자 공안이 할퀴고 뺨을 내리갈겼습니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공포감이 대단했습니다. 조선족 통역의 아내가 보석금 1700만원을 내줘 두 달 만에 풀려났을 때 몸무게가 14㎏이나 빠져 있었으니까요."

그가 귀국하자, 이 소식을 들은 국경없는의사회와 일본인 인권운동가 등이 그의 보석금을 대신 갚아줬다.

"중국 감옥의 경험은 오히려 제가 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해줬던 셈입니다. 본격적으로 북한 난민 구출에 뛰어들었으니까요."

몽골 탈출 루트가 너무 알려져 위험해지자, 그는 태국과 라오스 루트를 개척했다. 열차나 버스를 타고 중국 쿤밍(昆明)까지 와서 접경지역에서 메콩강을 따라 내려오는 루트였다.
 
태국 감옥에 갇혔을 때. 오른쪽이 ‘수퍼맨’.
태국 감옥에 갇혔을 때. 오른쪽이 ‘수퍼맨’.
―세간에서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탈북 브로커'라며 낮춰보는 시각도 있지요?

"처음 일을 할 때는 '이게 비즈니스가 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탈북자 한 명당 얼마를 남기면 돈 버는 계산이 나오니까요. 실제 그렇게 접근한 브로커들은 대부분 끝이 안 좋았습니다. 설령 이득을 남긴다 해도 사실 따지고 보면 몇 푼 되지 않습니다. 가령 '태국 루트'로 탈출시킬 때 안내자끼리 일곱 번의 인계인수 과정을 거칩니다. 경비 200만원을 받아서 7명이 나누면 얼마 안 됩니다. 게다가 이들 안내자는 대부분 2년 안에 적발됩니다. 정말 위험한 직업입니다."

―북한에 있는 주민을 한국까지 데려오는데 200만원이 든다는 뜻입니까?

"북한에서 중국으로 데려 나오는데 1500만원, 중국 국경지역에서 선양까지 데려다주는데 약 350만원입니다. 저는 주로 선양에서 우리나라로 데려오는 일에만 관여합니다. 탈북자들을 인계받아 이동시키고 중국을 벗어나는 데 약 일주일 걸립니다. 작년에만 186명이나 왔으니, 이 탈북 루트에는 늘 탈북자들이 서 있는 셈입니다. 이 때문에 저는 한시도 방심을 못 합니다."

2004년 그는 태국에서 다시 체포됐다.

"탈북자들은 중국 쿤밍에서 관광객으로 위장해 메콩강 유람선을 타고 대여섯 시간쯤 내려옵니다. 저는 태국의 국경도시인 치앙마이에 숙소를 잡아놓고 이들을 받습니다. 그날은 마침 덴마크의 왕자가 이 지역을 방문했습니다. 경비가 강화되면서 우리 일행이 눈에 띄었을 겁니다. 체포된 뒤 두 발에 족쇄를 차고 태국 감옥에 갇혔습니다. 재판에서 9개월 형을 받았지만, 보석금을 내고 두 달 만에 풀려났습니다."

그의 오른쪽 엄지발가락에는 총상(銃傷)도 남아 있다. 인신매매에 처한 북한 여성을 구하기 위해 중국 국경 마을의 한 집에서 마피아와 몸값 협상을 하다가 그렇게 됐다고 한다.

"저는 돈이 없으니까 그쪽에서 제시한 액수를 깎으려고 했지요. 그렇게 합의를 이룬 뒤 '지금은 그 돈이 없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하자 그 친구는 흥분했지요. 그냥 겁주려고 방아쇠를 당겼을 겁니다. '땅' 소리가 나고서, 제가 일어서려니 오른발이 젖은 것 같았습니다. 운동화 밑바닥이 일자로 찢겨 있었고,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다행히 발가락에 스쳐 지나갔습니다."

―중국 인신매매단이 어떻게 당신을 알고 연락해오는 겁니까?

"제가 중국에서 오래 활동해 왔으니까요. 며칠 전에는 '탈북 여성 3명을 팔아넘기겠다. 한 사람당 1000만원씩'이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한 명당 3백만원으로 협상한 뒤 송금해주겠다고 했지만 어떻게 돈을 마련합니까. 그 여성들은 팔려갔습니다. 이런 일을 하면 눈물을 많이 흘리게 됩니다."

―탈북자는 법적으로 한국 국민이고, 우리 정부는 이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현실에서는 정부가 아닌 민간이 개별 후원에 의지해서 하는군요.

"정부는 안 합니다. 통과된 북한인권법 안에는 북한 난민을 구출하고 돕는 내용이 없습니다. 돈을 주면 한 생명을 구하고 한 인생을 바꿀 수 있는데도 외면합니다."

―탈북자 구출에는 현실적으로 돈 문제에 맞닥뜨리는군요.

"제가 데려온 탈북자들이 정착하면 후원금을 내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 돈으로 또 구해올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탈북자 1000명을 데리고 왔을 때까지 그렇게 후원금을 내주는 이들은 단 두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29번이나 이사를 했습니다. 의료보험료를 70개월 동안 못 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들이 그런 체제에서 삶을 살아왔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거짓말하고 속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겪었던 고통과 불행을 알면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을 해오면서 보잘것없는 저 혼자라도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한국에 온 탈북자들은 북한 독재 정권의 증언자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북한에 남은 가족에게 송금도 합니다. 그런 돈과 정보가 북한을 바닥에서 변화시킬 겁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천안함 주적' 김영철이 내려왔다. 우리 정부의 특급 대접을 받으며.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25/201802250167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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