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혁 문화1부 기자
정상혁 문화1부 기자

장소는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무대이며, 이 때문에 그 자체로 역사·문화적 의미를 내포하는 상징이다. 누구도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일본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거나, 전남 진도 팽목항 앞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열지는 못할 것이다. 공간이 넓다거나 통행이 편리하다는 등의 이유로 장소의 맥락을 무시하고 되는 대로 행동하다간 개망신을 피하기 어렵다.

지난 11일 북한 예술단 삼지연관현악단이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특별 공연을 열었다. 1974년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기념식 도중 북한 공작원 문세광에게 피격 살해된 곳이다. 2010년엔 북한 정치범 수용소를 배경으로 인권 유린을 고발한 뮤지컬 '요덕스토리'가 상연돼 눈물바다가 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날 국립극장엔 예술단 핵심 현송월이 부른 '백두와 한라는 내 조국'이 울려 퍼졌다. 원곡에 '태양 조선 하나 되는 통일이여라'라는 가사(歌詞)를 담아 주체사상 혐의가 짙은 노래다. 북한 미사일 '광명성 3호' 발사 성공 직후 2013년 신년음악회 첫 곡으로 불린 곡이기도 하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앙코르"를 세 번 외쳤다. 김여정은 그런 통일부 장관 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현송월 삼지연 관현악단장이 11일 오후 서울 중구 국립중앙극장에서 '백두와 한라는 내 조국'을 부르고 있다. /뉴시스

8일엔 강릉아트센터 공연이 있었다. 강릉은 1996년 북한군 무장공비가 침투했던 곳이다. 소탕 작전을 벌이던 우리 국군 11명이 전사하고 27명이 다쳤다. 강릉에서 북한 예술단은 "사회주의 건설이 좋을시고" 같은 가사가 담긴 노래 '모란봉'을 부르겠다고 우겼다. 노래는 불리지 않았지만, 끝내 대표적인 체제 선전곡 '달려가자 미래로' 등을 개사해 불렀다. 북한 공연 전문가 강동완 동아대 교수는 "교묘하게 의도한 음악 폭탄이 터졌는데 감성의 눈으로만 바라보면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예술단이 지난 10~12일 묵은 숙소는 서울 광진구에 있는 워커힐호텔이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과 맞서 싸운 미국 장군 월튼 워커(1889~1950)의 이름을 딴 호텔이다. 워커 장군은 당시 맥아더 장군과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고,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했으며, 이 땅에 목숨을 바쳤다. 그의 아들도 군에 합류해 한국을 지켰다. 1963년 지은 호텔 내에는 워커 장군 추모를 위한 기념비가 있다. 그는 생전에 "stand or die"라는 말로 장병들을 독려했다. "지키지 못하면 죽음뿐"이라는 서릿발 같은 결의였다.

평화는 소중한 것이고, 예전의 적이 영원한 적일 수 없다. 그러나 상대의 미소와 호의에서 상징과 의미를 끌어내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니다 보면 상대는 곧 예전의 적으로 돌변할 것이다. 김영남은 서울 공연에서 세 차례 눈물을 보였다. 감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눈물의 의미를 헤아리지 않으면 우리가 피눈물을 흘려야 할 날이 올지 모른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12/20180212027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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