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여동생을 특사로 보내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이미 예상됐던 일이다. CNN도 "김여정이 문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제안할 것"이라고 앞서 보도했었다. 북이 핵 고수 의지를 밝히고 있는 상태에서 평창올림픽이 끝나면 국제사회의 북에 대한 제재·봉쇄는 더 강력해지게 돼 있다. 한·미 연합훈련도 바로 시작된다. 김정은이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선 한국 정부를 방패막이로 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중에서도 효과적인 것이 남북 정상회담이란 대형 이슈를 던지는 것이다. 김정은이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2000년 6월 첫 남북 정상회담 때는 미·북 제네바 회담에 따른 북핵 동결 상태였고, 2007년 10월 2차 정상회담은 앞선 6자회담에서 '2·13 북핵 합의'를 이뤄낸 바탕 위에서 성사됐다. 지금은 1·2차 정상회담 때와는 완전 딴판이다. 김정은은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거듭한 끝에 미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핵 단추가 자기 손 안에 있다며 미국을 공갈 협박하고 있다. 미국은 북핵 능력을 제거하기 위해 무력까지 동원할 태세다.

문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에 응할 수 있는 경우는 한 가지뿐이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이 핵을 포기한다는 합의 문서에 도장을 찍거나 그에 준하는 약속을 내놓거나, 최소한 핵 폐기를 전제로 하는 미·북 회담에 나가겠다고 사전에 합의돼야 한다. 그렇다면 정부가 바라는 대로 북핵 폐기 회담과 남북 회담이 동시에 진행될 수 있다. 이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금으로선 북이 핵을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문 대통령이 평양 초청장을 받은 바로 그날 북은 "미국에 맞서 핵 억제력을 질량적으로 강화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한·미를 이간하려는 뻔한 수법이다. 미국이 이를 모를 리 없다. 펜스 부통령은 김여정의 청와대 예방을 앞두고 "비핵화는 변화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했다. 북이 과거처럼 핵 무력 완성 시간을 벌면서 그 중간에 대북 제재를 이완시켜 볼 계산이라면 대화에 응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고, 한국 정부도 그런 대화를 주선하겠다고 나서지 말라는 것이다. 펜스 부통령이 북의 김영남과 맞은편에 앉으라고 우리 정부가 마련한 만찬 자리를 거절한 것도 마찬가지 메시지다.

문 대통령이 정상회담 제안에 대해 "앞으로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켜 나가자"고 예상과는 달리 신중한 태도를 보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여건'에 대해 "북·미 간 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먼저 북이 비핵화 의사를 밝히고 이를 미국이 받아들여 북핵 폐기 회담이 시작되는 것이 최우선이다. 이것 없는 평화 이벤트는 전부 눈가림 쇼에 불과하다.

문 대통령이 신중한 대응을 했지만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유혹은 대단히 클 것이다. 북이 핵 포기 의사를 밝히지 않아 미·북 회담이 열리지 않으면 결국 조급증을 드러내고 북의 의도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다. 이 정권이 북핵의 위험성을 미국보다 가볍게 보고 있는 것도 심각한 사태를 부를 수 있다. 문 대통령이 10일 북 대표단을 만난 2시간 40분 동안 "북핵 얘기는 한마디도 없었다"고 한다. 환담이나 하면서 일부러 핵 얘기를 피한 셈이다. 북이 싫어하는 주제를 꺼내기 두려웠던 것이다. 이런 자세로는 한반도 운전석은커녕 조수석에도 앉지 못한다.

과거 남북 정상회담은 모두 한국 대통령들이 먼저 안달을 해 성사됐다. 이번엔 반대였다. 김정은이 자기 혈육을 청와대까지 초청장을 들려 보냈다. 북의 사정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증거다. 북한 경제 전문가들은 국제사회 제재 때문에 북의 수출이 올해 90%까지 줄어들 수 있다고 분석한다. 지금 대북 제재는 과거와는 다르다. 북이 평창올림픽을 훼방놓지 않고 참가하기로 한 것도 대북 제재 때문이다. 북핵 해결의 열쇠는 대북 제재에 있다. 이것만이 평화적으로 문제를 풀 유일한 수단이다. 김정은은 이를 무산시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문 대통령이 이에 말려드는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11/201802110183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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