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華 떠받드는 유교 질서… 주권국 인정하는 서구 체제
우리 선택은 독립·자주여야… 비위 맞추기 급급해선 안 돼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불과 반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지만 횟수로 계산할 때 거의 매달 한 번꼴로 한미, 한중 정상 회담을 열었다. 정상외교의 성과를 자화자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미국, 중국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우리의 운명이 대폭 개선된 것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더 어려운 방향으로 꼬이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욱 솔직한 분석일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의 국가 대전략이 정립되지 못했고 외교력도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미국에는 미국이 좋아하는 말을 함으로써, 그리고 난 후 중국에는 중국이 좋아하는 말을 함으로써 두 강대국의 비위를 맞추는 데 급급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이 꼬이게 된 더욱 심각한 이유는 북한 핵문제 및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인식 및 접근 방법이 전혀 다르다는 데서 유래하는 것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항해술을 통해 전 지구를 하나의 단위로 작동할 수 있게 한 16세기 초엽 이래, 세계의 패권은 포르투갈-네덜란드-스페인-영국-미국이 차례로 차지했다. 지난 500년 동안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 미국 등 패권을 차지하는 데 성공한 도전자들도 있었고 프랑스, 독일, 그리고 소련처럼 패권 도전에 실패한 제국들도 있었다. 누가 패권을 장악할 것이냐에 대한 결정을 위해 패권국과 도전국 사이에는 큰 전쟁들이 주기적으로 발생했다. 패권전쟁이라고 불리는 이들 전쟁에는 나폴레옹전쟁, 1·2차 세계대전, 1945년 이후의 냉전 등이 포함된다. 과거의 모든 패권 전쟁이 서양 국가들 사이에서 발발했던 것과는 달리 작금의 패권 경쟁은 동양과 서양의 강대국 사이에서 야기되는 예외적이며 특이한 것이다. 과거 패권경쟁은 적어도 생각은 같은 나라 간의 다툼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4일 오후 베이징 인민대회당 서대청에서 열린 MOU 서명식을 마치고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양 사람들은 인간 혹은 국가가 상호 평등하게 대접받을 때 그들 사이에 평화와 질서가 가능하다고 본다. 반면 중국 사람들은 인간 혹은 국가들은 서로 평등할 수 없으며 각자 사회적인 위계(位階) 속에서 규정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행할 때 평화와 질서가 가능하다고 본다.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형과 동생, 왕과 신하가 평등할 수 없듯이 국제관계도 힘에 따라 위계적으로 구성되어야 평화와 질서가 가능하다고 본다. 작은 나라는 큰 나라에 사대(事大)하고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예와 모범으로 다스릴 때, 즉 자소(字小) 할 때, 국제정치에 평화와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국가들이 서로 대등한 주권을 가진 국제체제가 아니라 조공(朝貢), 책봉(冊封) 제도를 통해 위아래가 분명한 국제제체를 건설하고자 했다. 물론 인간 세상의 최고봉인 천자(天子)가 다스리는 나라이자, 가운데서 빛나는[中華] 나라가 중국이어야 했다. 이처럼 미국과 중국은 누가 일등이냐를 넘어 세상은 어떻게 구성되고 다스려져야 하느냐를 놓고 다투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입장에서 보기에 '북한 핵문제'는 패권 경쟁의 와중에 불거진 작은 문제일 수 있고 대한민국은 자기편으로 만들어 두는 게 유리한 비교적 큰 졸(卒)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중국을 형님으로 모셔야 하는 위계질서의 세상, 즉 유교적 국제질서를 택할 것이냐 혹은 비록 실제적 힘은 다를지라도 상대방을 서로 독립 주권 국가로 인정해 주는 서구 국제체제 속에서 살 것을 택할 것이냐를 강요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과거 우리의 선조국가 조선은 중국의 영향력 아래 굽신거리며 사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그 대가로 책봉을 받은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조선 국왕의 권위는 조선의 신민들로부터가 아니라 중국 황제의 책봉으로부터 나왔으며 조선의 왕은 당연 히 중국 황제의 아랫것이었다. 혹시 중국은 지금 대한민국을 과거의 조선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나라를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실체로 인정해주는 국제질서일 것이다. 김정은의 교시 중 '중국은 천년 숙적(宿敵), 일본은 백 년 숙적'이라는 내용이 있었으니 북한 역시 중국적 국제질서 관념을 결연히 거부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2/17/201712170145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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