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 '농업으로 보는 한국통사' 출간
 

한국사 분야의 석학이자 학술원 회원인 김용섭(86) 연세대 명예교수가 평생의 연구 성과를 압축해서 담은 한국사 개설서를 내놨다.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 평생 동안 한국 농업사 연구에 전념했고 10여년 전부터 우리 고대사 탐구에도 몰두하고 있다.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 평생 동안 한국 농업사 연구에 전념했고 10여년 전부터 우리 고대사 탐구에도 몰두하고 있다. /지식산업사
최근 출간된 '농업으로 보는 한국통사'(지식산업사)는 김 교수의 주 전공인 한국 중세·근대 농업사 연구와 지난 10여년 집중해 온 문명사적 관점의 한국 고대사 탐구를 종합해서 한국사의 발전 과정을 거시적 관점에서 정리했다. 노(老)대가가 자신의 학설을 밀도 높게 녹여낸 이 책은 특히 고대사에 대한 과감한 가설과 파격적인 해석으로 화제와 논란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김용섭 교수는 우리 민족이 중국 요하문명권에서 꽃핀 홍산문화의 주역이었던 청구국(靑邱國)에서 시작됐다고 본다. 청구국이 중국 민족·문명의 시조인 황제(黃帝)의 정복 전쟁으로 무너진 뒤 그 유민은 요동과 요서에 자리 잡았다. 요서의 맥족(貉族)은 부의 균형 있는 배분을 중시해 농업 공동화를 추구했고, 요동의 예족(濊族)은 국가 발전을 위한 경제개발을 중시해 대토지 소유제를 지향했다. 두 종족이 연합해서 고조선을 세웠고 맥족의 환웅(桓雄)과 단군(檀君)이 정권을 잡아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내걸었다. 하지만 농업 발전을 추진하는 세력들이 정변을 일으켜 예족의 기자(箕子)를 추대했다.

중국 한(漢)나라의 침략으로 고조선이 멸망하자 유민들은 백두산 북서쪽과 요동에 부여를 재건했다. 그러나 정치적 지향이 다른 두 그룹이 오래 함께하기는 어려웠다. 맥족은 고구려와 백제를 건설했고, 예족은 남쪽으로 내려와 삼한(三韓)에 이어 신라를 건설했다.

요하문명과 홍산문화는 일부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도 한국상고사와 연관시켜 주목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고조선의 기원으로 특정 부족국가를 적시하고 고조선의 운영 원리가 변화한 과정을 대립적 정치 이념의 갈등으로 설명한 것은 지금까지 없던 시도이다. 삼국의 사회·경제적 지향을 고조선의 두 흐름을 각각 계승한 것으로 보는 것도 독특한 시각이다.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대한 설명은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김 교수의 지론에 입각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토지 집적이 확대됐고 농업 생산의 발전과 농촌 사회의 분화가 발생했다. 19세기 중후반 개항 이후 외세와 외래 자본의 침투로 민족적 모순이 중첩되는 가운데 국가적 혼란이 계속됐고 두 갈래의 개혁안이 제시됐다. 양반 지주층은 조세를 비롯한 수취 체계를 바로잡으면 된다고 주장했고, 농민층은 지주제를 해체해서 농민 경제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제 치하에서 자본주의적 농업기구로 재편되면서 반(半)봉건·반(半)자본주의적 성격을 갖게 된 토지제도는 결국 광복 후 남한의 농지 개혁, 북한의 토지 개혁과 농업 협동화를 통해서 해결책을 찾았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3000년이 넘는 한국사를 농업 발전과 정치 이념이란 관점에서 하나의 이론 틀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김용섭 교수는 "우리나라는 정치 이념이 다른 두 종족이 결합하여 하나의 국가를 형성했으므로 이를 종합 절충하여 통합 이념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렇게 하지 못했고 지금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07/20171107000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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