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군의 대외 신인도는 美·日이 한국과 민감한 정보… 공유를 주저할 만큼 바닥
이 와중에 외교 안보 부처들 적폐 청산 경쟁하며 치부 드러내기에 열중
 

박두식 부국장
박두식 부국장

미국 대통령의 하루는 CIA(중앙정보국) 등 정보기관이 작성한 5~6쪽 분량의 기밀 보고서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PDB(President's Daily Briefing·대통령 일일 보고)로 불리는 보고서다. 여기에는 CIA 등이 전 세계 첩보망을 통해 수집한 각국의 주요 정보가 들어 있다. 이 보고서가 처음 대통령에게 전달된 것은 1946년 2월 15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 시절이다. 국가 지도자가 외교·안보·경제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최고 수준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그로부터 71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이 전통은 그대로 지켜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대선 후보 시절 "나는 똑똑한 사람이라 매일 하는 정보 브리핑은 필요 없다"고 했지만 취임 후엔 일일 보고서 말고도 거의 매일 정보기관으로부터 대면(對面) 보고를 받고 있다고 한다. 이 자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북한이다.

마이클 폼페이오 CIA 국장은 지난 6월 언론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북한에 관해서 묻고, 미국이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질문한다"고 전했다. 대통령의 '정보 수요(需要)'가 커지면 각 정보기관들은 이에 맞춰 총력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CIA가 지난 5월 '코리아 임무센터(KMC)'라는 조직을 새로 만든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CIA가 특정 국가 문제를 전담하는 조직을 신설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폼페이오 국장이 트럼프 대통령과 매일같이 북한 문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할 무렵 우리 국가정보원은 '적폐 청산 TF(태스크포스)'를 만들었다. 외부 인사들이 주축인 이 TF는 지난 넉 달여 혁혁한(?) 성과를 내놨다. 전(前) 정권과 전전(前前) 정권에서 자행된 치졸한 정치 공작의 일부를 들춰낸 것이다. 덕분에 이명박 정부에서 국정원 심리전단 팀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가까웠던 남자 배우와 어느 여배우가 뒤엉킨 합성 사진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 일부 우파 단체들에 뒷돈을 대주며 정권에 우호적인 댓글을 달거나 야권(지금의 여권) 인사들을 비방·폄하하는 글을 쓰도록 유도했다는 게 국정원 적폐 청산 TF가 찾아낸 주요 혐의다.

군 사이버사령부도 이 댓글 공작에 동원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정치인과 연예인에 관한 동향보고서도 만들었다고 한다. 국정원 심리전단 또는 군 사이버사령부라는 거창한 이름의 조직이 이런 3류 정치 공작이나 벌이고 있었다는 얘기다. 사실이라면 검찰 수사와 재판을 통해 단죄(斷罪)해야 한다.
12일 오전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사이버사령부 댓글 사건과 관련한 의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오종찬 기자

그러나 국정원과 군 정보 조직의 진짜 더 큰 적폐는 다른 데 있다. 한국 정보기관들의 대북(對北) 정보 수집과 판단은 '실패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일성·김정일 사망을 비롯한 북한 정권 내부의 결정적 변화가 발생한 순간엔 허둥댔고, 북의 핵·미사일 도발 징후를 놓고도 기관마다 해석이 엇갈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런 무능과 나태, 전문성 부족이야말로 진짜 적폐다. 북한의 안보 위협이 최고조에 이른 지금 이 순간 문재인 대통령이 고민해야 할 정보기관들의 근본 문제는 과거 이들이 자신을 겨냥했던 3류 댓글 공작이 아니라 매일 자신에게 올라오는 정보의 질(質)과 수준이어야 한다.

한국 정보기관의 대외 신인도(信認度)는 이미 바닥이다. 한 전직 정보 관계자는 "미·일 정보기관들이 민감한 북한 관련 정보를 한국에 제공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했다. 얼마 전 국회 국정감사에서 한·미(韓·美)가 함께 만든 김정은 참수(斬首) 작전이 포함된 '작전계획 5015'를 비롯해 군사기밀이 대거 북에 넘어간 것으로 드러났다. 국방통합데이터센터(DIDC)를 해킹해서 무려 A4 용지 1500만장에 이르는 군 정보를 빼냈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가 이런 대한민국과 최고급 기밀을 공유(共有)하겠는가.

그러나 문 정부는 이 심각한 상황을 애써 외면하는 듯하다. 한국 합참의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 지휘부로부터 보고받은 대북(對北) 군사 옵션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모른다"고 했다. 외교부 장관은 트럼프가 멘토처럼 떠받드는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나눈 한반도 전략에 대해 "보고받지 못했다"고 했다. 과거 한국 외교는 이러지 않았다. 외교 기술과 언어가 서툴고 거칠었어도 한국 관련 사항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추적했다. 이 정부 관계자들은 나라의 운명과 직결된 중요 정보들을 모르는 것이 마치 당연 한 일인 양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외교·안보 부처마다 경쟁하듯 과거 적폐 청산팀을 만들어 스스로의 치부를 세계에 알리느라 분주하다. 누워서 침 뱉기란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정부 누구도 CIA가 독자적인 한반도 관련 정보 조직을 신설한 이유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코리아 패싱(한국 건너뛰기)'이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0/17/20171017039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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