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중이던 1951년 7월 10일, 피란지 임시 수도 부산의 시청 앞과 국제시장 등 10여 곳이 남녀노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재무부가 이날 '애국복권' 발매를 개시하자,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판매소에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새치기 마라" "소매치기 조심하라" 등의 고함 소리가 요란했으며, 질서를 잡기 위해 경찰관까지 출동했다. 불특정 대중을 상대로 발행된 첫 현대식 복권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1장 액면가 500원씩인 '추첨식'뿐 아니라 당첨 여부를 바로 확인하는 200원짜리 '개봉식'을 함께 팔았다. 두 종류 모두 1등 상금은 액면가의 1만 배였다. '개봉식'을 산 사람들은 대부분 곧바로 뜯어보지 않고 소중히 들고 어디론가 자리를 떴다(동아일보 1951년 7월 12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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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당첨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피봉식(皮封式) '애국복권'을 발매하자 길거리 판매소에 구름처럼 몰린 시민들(왼쪽·1957년 2월 28일 자 '대한뉴스' 화면). 오른쪽은 1951년부터 발행된 '애국복권'들.

당시 이승만 정부는 "부동 자금을 산업 부흥 자금으로 흡수하기 위해 복권을 발행했다"고 했다. 전선에서는 북한군과 교전 중이던 때였지만 후방의 시민들은 '돈 놓고 돈 먹기'에 열광했다. 초창기엔 추첨까지의 기간이 무척 길었다. 오늘의 로또는 1주일마다 추첨하는데도 기다리기 힘들다는 사람이 있는데, 제1회 애국복권의 추첨일은 발매 개시로부터 3개월 뒤였다. 너무 오랜 시간 뒤에 발표한 탓인지, 1등 당첨자가 발표 결과를 못 챙기는 일도 있었다. 1952년 제3회 애국복권 1등에 당첨된 모씨는 발표 1주일이 지나서야 당첨 사실을 알고 허겁지겁 은행으로 달려갔다. 또 1950년대 후반엔 부산에서 구두 수선을 하던 노인이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자 팔자를 고치게 됐다며 구두 수선통을 바다에 던졌다가, 복권을 수선통에 숨겨 놓았던 사실을 뒤늦게 떠올리고 가슴을 친 일이 있다는 회고도 있다.

복권 초창기엔 고액 당첨자들의 이름, 나이, 상세한 집 주소 등 신상 정보가 신문 등에 낱낱이 공개됐다. 복권 운영의 투명성을 밝히려는 주최 측 결정이었으나. 당첨자들은 "굴러들어온 떡이니 행운을 나누어 갖자" "함께 사업하자"며 달려드는 온갖 사람들 때문에 상상 이상의 고통을 겪었다. 전쟁통엔 잘 팔리던 애국복권의 인기는 1950년대 중반부터 시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행 실무를 맡고 있던 은행 직원 셋이 당첨 복권 1천 장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되는 일까지 일어났다(조선일보 1957년 6월 17일 자). 결국 애국복권은 1957년 8월에 발행을 중지했다.

제1회 애국복권이 발매되던 1951년 여름엔 장맛비가 주르륵 내리던 날에도 복권집 앞엔 우산도 받지 않은 사람들 행렬이 이어졌다. 전쟁통에 웬 복권 열풍인가 하는 궁금증에 당시의 신문은 이렇게 답했다. "지금처럼 가난하고 생명이 불안정한 시대에는 누구나 돈의 꿈을 꾸게 되는 법이다."

어수선하게 시작됐던 한국의 복권 열풍은 60년이 넘도록 식지 않고 있다. 2016년 복권 매출은 전년도보다 9.3%나 증가한 3조8855억원이나 됐다.  정부가 복권 매출 총량 한도를 규제하자 복권 판매인협회는 최근 "풍선 효과로 불법 스포츠 도박이 더 늘어나고 있다"며 규제 완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일부이겠지만 어떤 사람은 상금이 수천억원에 이르는 '파워볼' '유로밀리언' 등 해외 복권 구입도 시도한다고 하니 씁쓸하다. 오늘의 복권 사랑이 '가난하고 불안정한 시대에 꾸는 돈의 꿈'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19/20170919032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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