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처, 미테랑, 고르비, 부시…
국제정치 거물들 설득하며 독일 통일 이룬 콜 총리는 뚝심의 장거리 선수였다
남북 관계도 장거리 경주… 文 정부, 너무 조급해 보여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지난 16일 서거한 헬무트 콜(Helmut Kohl· 1930~2017) 전 독일 총리는 보기 드문 거한(巨漢)이었다. 콜은 몸집처럼 큰 스케일로 역사를 새로이 썼다. 1982년 서독 총리에 취임해 1998년 통일 독일의 총리로 퇴임함으로써 최장수 독일 총리 기록을 세웠다. '독일 통일의 아버지'이자 '유럽연합(EU)의 비조(鼻祖)'인 그가 아니었다면 번영하는 오늘의 독일과 유럽은 불가능했다.

동서(東西) 화해의 헬싱키 프로세스를 살려 대업을 이루는 데는 콜의 진중함과 주도면밀함이 큰 역할을 했다. 첫 부인 한넬로레의 말처럼 그는 "정치적인 장거리 선수였다." 지도자로서 콜에겐 조급함과는 거리가 먼 국가백년대계(國家百年大計)의 듬직한 리더십이 있었다. 그의 자서전인 '나는 조국의 통일을 원했다'가 밝힌 대로 '절대 환상을 갖지 않고, 항상 사실과 현실을 바탕으로 행동'한 거인의 행보야말로 통일 비결이었다.

콜의 냉철함은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문재인 정부의 난맥상과 대조된다. 문정인 특보의 설화(舌禍)에다 홍석현 특보의 사의(辭意)까지 겹쳤다. 하물며 이번 회담은 문 대통령의 국제무대 데뷔의 장(場)이다. '북한이 핵·미사일 활동을 중단하면 미국 전략 자산의 한반도 전개와 한·미 연합 훈련을 줄일 수 있다'는 문 특보의 부적절한 발언은 문재인표 외교·안보를 흐트러뜨리고 있다. 그건 일개 학자의 사견(私見)이 아니다. 그는 문 대통령의 공인된 외교·안보 멘토다. 게다가 "사드로 한·미 동맹이 깨진다면 그게 무슨 동맹이냐. 그 동맹을 어떻게 믿느냐"는 감정적 발언은 자해적이기까지 하다.

이 모든 혼란의 근원에는 남북 정상회담으로 일거에 한반도 문제를 풀려는 문재인 정부의 조급증이 자리한다. 하지만 독일 통일이 증명하듯 모든 것엔 때와 순서가 있다. 독일 통일은 역사의 포르투나(fortuna·행운)와 콜의 비르투(virtu·역량)가 합작한 기적의 산물에 가깝다. 참혹한 민족상잔을 겪은 데다 동독보다 훨씬 호전적인 유일 체제와 핵무기로 무장한 북한과의 교섭에서 조급증은 금물이다. 우여곡절로 가득한 남북 교섭의 역사가 증명하는 그대로다. 한반도 문제 해결은 동북아 평화 구조를 창출하는 경세가의 비르투와 장구한 시간을 요구한다.

독일 통일의 주역 헬무트 콜 전 총리가 16일(현지시각) 루드비히스하펜 자택에서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사진은 지난 2003년 1월 통일 독일의 상징인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서 있는 콜 전 총리. /AP 연합뉴스

콜은 세계적 거물들을 상대했다. 프랑스의 미테랑과 미국의 조지 H W 부시,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통일 독일을 반대한 영국의 대처는 일세를 풍미한 걸물(傑物)이었다. 국제 정치의 거인들을 설득해내는 험난한 과정을 콜은 뚝심으로 돌파했다. 특히 소련이야말로 통일의 열쇠를 쥔 국가라는 인식은 콜뿐만 아니라 독일 보수·진보의 일치된 공감대였다. 개혁·개방의 전도사 고르바초프가 없었다면 독일 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처음에 통독을 반대했던 고르바초프의 마음을 돌리는 데는 콜의 역량이 결정적이었다.

콜의 4강 외교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정치 외교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서독의 경제력과 민주주의를 발판으로 평화와 번영의 통합 유럽이라는 큰 그림을 그려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영·불·소를 견인했다. 드라마틱한 한편의 정치 예술이었다. 그 결과 그는 '역사 속을 지나가는 신의 옷자락을 잡아채는 정치가의 사명'을 이룬다. 문재인 대통령도 통일을 바라는 진정성과 평화 의지로 충만하다. 하지만 정치가의 진정성은 콜처럼 역사 현실의 검증을 통과해야 비로소 유효하다. 남북 관계는 어설픈 주관적 희망 대신 냉정한 현실과 사실에 입각해야만 한다.

문 대통령은 콜을 '위대한 지도자'로 기렸다. 동독의 실체를 인정한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계승했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사실 콜은 아데나워의 친(親)서방정책과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통합한 인물이다. 1980년대 미국이 서독에 배치한 중거리 핵미사일(퍼싱 II)에 대한 독일 내 반대운동을 콜이 맹렬하게 비판한 이유다. 소련이 동유럽에 먼저 배치한 중거리 핵미사일(SS-20) 도발엔 서독의 진보 정치인과 운동가들이 침묵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콜은 힘의 우위를 통한 평화를 지향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였다. 따라서 북한의 치명적 핵위협이 상존 하는 한 방어용 무기인 사드 배치는 불가피하다. 핵을 가진 김정은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방식의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남북 관계는 일백년 단위의 장거리 경주이기 때문이다. 1987년 콜은 호네커 동독 국가원수를 서독으로 불렀다. 철저히 콜이 주도한 정상회담으로 거대한 동서 화해의 시대를 열었다. 우리 시대의 거인, 콜의 비르투가 그립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21/201706210369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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