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용사 감사 행사' 11년째… '흙수저' 출신 소강석 목사]

"작은 키에 외모 볼품없고 지방 신학교 졸업했지
화려한 스펙도 없지… 속된 말로 '흙수저'인데…"

"성조기를 불태우는 등 '反美시위' 할 수 있는 건
자유민주주의의 꽃씨를 당신들이 뿌려준 덕분"
 

"이런 유행가가 있지 않습니까. '잊지는 말아야지 헤어져 있어도, 잊지는 말아야지 만날 순 없어도….' 사람은 올챙이 시절을 기억해야지요. 보은(報恩)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이름도 모르는 낯선 이국땅에 와서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파란 눈의 용사(勇士)들이 없었으면 어떻게 오늘의 우리가 있겠습니까."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새에덴교회의 목회가 끝난 뒤였다. 하지만 소강석(55) 목사는 성대 결절이 된 목소리로 여전히 교인들 앞에서 설교하듯이 말했다.

"우리 교회가 '6·25 참전 용사 감사행사'를 시작하니 보훈처에서 뒤따라 했어요. 보훈처가 항공료만 대줄 때, 우리는 항공료·숙식·관광 등 일체를 다 부담해왔지요. 11년째 됐습니다. 지금까지 참전 용사와 가족 약 3000명을 섬겼습니다. 이분들이 고령(高齡)이라 이제 비행기를 타는 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올해는 미국 휴스턴에서 감사행사를 엽니다."

―행사 경비는요?

"한 번에 120명을 초청했을 때 7억원이 든 적 있었습니다. 보통 3억원 선입니다. 우리 교인들이 헌금을 냅니다."

―부자(富者) 교회인 모양이군요.

"지도자가 어떻게 교인들을 설득하고 감동시키느냐에 달렸지요. 정신이 중요하지요. 교회가 올바른 사회를 위한 소금이 되고 보루가 되고 그루터기가 돼야 하지 않습니까. 기본적으로 국가가 있어야 종교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상과 가르침은 국경이 없으나, 당시 예수님도 국경 안에서 애국자로 살았다고 봅니다."

소강석 목사는 “카리스마가 있을수록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소강석 목사는 “카리스마가 있을수록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 최보식 기자

―젊은 세대는 이런 말에 냉소합니다. 교인들의 이념적 성향도 다 같지는 않을 텐데요.

"제가 무식하거나 머리가 나빠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시대 유행에 편승만 해서 되겠습니까. 교인들이 행사 경비 지출을 따진 적 없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 해도 저는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력으로 덮어버릴 겁니다."

―어떤 계기로 '참전 용사 감사 행사'가 시작된 겁니까?

"2006년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마틴 루서 킹 퍼레이드' 전야제에 참석했을 때입니다. 한 흑인 노병(老兵)이 '동두천, 의정부, 평택' 하며 허리춤을 풀어 총상(銃傷) 자국을 보여줬습니다. '그 뒤로 한국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순간 눈물이라기보다 내 동공(瞳孔)에 이슬이 촉촉해졌어요. 넙죽 엎드려 큰절을 하고는 '한국에 초청하겠다. 친구들과 같이 와도 좋다'고 했습니다. 당장 이듬해 6월에 추진했어요. 10명쯤 올 줄 알았는데 40명이 신청했어요."

―일회성 이벤트로 끝내지 않고 왜 지금까지 계속 하게 됐습니까?

"그해 7월 북한 대포동 2호 미사일 시험 발사로 남북관계가 경색됐을 때 워싱턴에서 미 예비역 장성과 백악관 직원들 모임에서 설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참석자들이 설교 내용에 대해선 질문하지 않고 '시위대가 성조기를 불태우고 짓밟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 한국은 왜 미국을 미워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전에 TV 뉴스로 '효순·미선이 사건 시위'를 본 것 같았습니다. 제가 '당신들이 자유민주주의의 꽃씨를 뿌렸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라서 친미도 반미도 있는 거다. 시위대만이 한국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흘렀던 피와 땀을 잊지 않는다. 매년 참전 용사를 초청하겠다'고 했습니다."

―평양에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를 보수 꼴통으로만 보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는 2000년부터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에 의약품 등을 지원해왔어요. 2007년 말 평양에 갔더니 강영섭 조선그리스도교 연맹위원장이 '왜 참전 용사 초청 행사를 하느냐. 우리와 싸우겠다는 뜻이냐'라고 했습니다. 평양 땅이라 좀 움찔했어요. 제가 '오해하지 말라. 전쟁이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는 취지의 행사다, 참상과 고난의 역사도 기억해야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고 말했지요."

―북한을 방문해본 소감은 어땠습니까?

"어려운 형편엔 눈물지었지만, 평양의 창광유치원을 갔을 때 아이들을 주체사상으로 세뇌시키는 실상을 봤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통일 한국을 대비해 인재를 양성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북한을 다녀온 뒤 교육관·문화관 시설을 갖춘 지금의 교회를 짓기 시작했지요."

그의 교회는 개신교계에서 드물게 급성장하는 교회다. 현재 대형 교회들은 19 70~80년대에 자리를 잡았고 세대교체가 됐다. 그는 후발 주자로서 유일하게 개척 교회를 국내 10대 대형 교회로 이뤄냈다. 지상 10층과 지하 3층으로 연면적 1만평에 4500석의 예배당을 갖추고 있다. 교인 수는 4만명쯤 된다.

―대기업으로 치면 일종의 창업자 회장이군요.

"저는 지방 신학교를 졸업했지, 세상에 내세울 만한 화려한 스펙도 없고, 작은 키에 외모도 볼품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열등감이 도전하게 만들었고, 성공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는 전북 남원의 유교 집안 출신이다. 교회에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나갔다. 신학교 진학 문제로 집안에서 쫓겨났다. 장학생으로 신학교에는 들어갔지만 방학 때면 수박, 오이 행상을 해가며 생활비를 벌었다고 한다.

그는 1988년 서울 가락동 상가 건물의 지하 25평을 빌려 개척 교회를 열었다.

"주변 교회의 목회자들이 다 쟁쟁했어요. 아내가 '당신 학벌로 여기서 어떻게 경쟁하느냐. 지방에 내려가자'고 했습니다. 상처가 컸지요. 첫 주일 낮 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교회가 세들어 있는 건물주와 교회 간판을 달았던 간판집 아저씨, 그리고 할머니 한 분이었습니다. 그날 밤 예배에는 장모님과 아내뿐이었습니다. 저는 교회의 빈 의자에 손을 얹고 '하나님, 깡패·도둑놈도 좋으니 사람 좀 앉혀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하고 다녔지요."

―목사를 하면서 신문 배달을 했다고요?

"아파트에 경비가 있어 함부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신문 배달을 했던 거죠. 신문을 안 보는 집까지 교회 전단을 집어넣었지요. 색다른 글귀나 내용으로 눈길을 끌었지요. 신도를 모으는 데 효과가 있었습니다. 교인 수가 50명쯤 됐을 때는 경로잔치를 열었어요."

―그런 열정이면 다른 일을 했어도 크게 성공했겠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4차 산업의 신혁명을 이룬 거죠. '맨손, 맨몸, 맨땅'인 소위 '3M'으로 시작한 겁니다. 한국 교회에서도 저를 '맨발의 소명자'라고 인정했으니까요.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거죠."

―목회 동영상을 보니 설교 도중에 유행가도 몇 곡조 뽑는 등 한편의 일인극같더군요. 언뜻 '약장사'가 떠오르기도 했고.

"그런 말을 많이 듣죠. 설교의 언어와 제스처는 정형화돼 있죠. 하지만 지금은 권위와 제도가 파괴되고 스토리 텔링, 공감 능력, 감성 등이 더 중요하죠. 목회자의 격조, 우아함에서 하나님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게 과거의 설교였다면, 앞으로는 목회자가 하나님의 광대 역(役)을 맡게 된다고 봅니다. 저는 설교에서 '까인다' '조지려고 한다' '아주 그냥 죽여줘요'라며 그냥 던집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생명력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제가 망가지는 거죠. 제 스스로는 이를 '엿장수 목회'라고 하지요. 사이다병 같은 폐품을 가져오면 맛있는 엿으로 바꿔주는 것처럼 상처입고 아픈 마음을 치유해 하나님께로 안내합니다."

17일 미국 휴스턴에서 ‘6·25 참전용사 감사 행사’가 열렸다.
17일 미국 휴스턴에서 ‘6·25 참전용사 감사 행사’가 열렸다. /새에덴교회 제공

―이제는 중년으로 접어든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인데, 품격·깊이·진지함을 기대하지 않을까요?

"돌아가신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는 디그니티(dignity), 우아하죠. 저도 지성적인 목회자로 이미지를 고쳐보려고 했는데, 그렇게 설교하니 교인들이 '목사님 어디 아프십니까'라고 해요. 대통령이 참석한 국가조찬기도회를 할 때도 제 스타일대로 해버립니다. 제 설교에 대해 비판도 있지만, '굉장히 파워풀하다' '중독성 있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광야형·야성형입니다. 광화문 광장이나 대형체육관에서 마이크를 잡으면 진짜 제 실력이 나옵니다."

―이런 언변은 타고난 것이겠지요?

"기본은 타고나지만, 끊임없는 자기 계발을 합니다. 가왕(歌王)인 조용필은 노래 한번 부르기 위해 몇백번 연습하지 않습니까. 저도 젊었을 때 설교 원고를 쓴 뒤 묵상하고 자구수정을 되풀이했습니다. 문을 잠그고 혼자서 강단에 서서 강약을 어떻게 줄 것인지 실전처럼 연습했습니다."

―가수 남진씨가 이 교회의 장로, 송대관씨는 집사라고 들었습니다. 연예인 인맥이 많군요.

"속된 말로 저는 '흙수저' 아닙니까. 진골·성골이 아니라 그냥 해골입니다. 처음 교회를 열었을 때 저를 보려고 교인들이 모이진 않았습니다. 누가 제 설교를 듣겠다고 오겠습니까. 사람들의 호감을 얻으려면 좋고 즐거운 일을 많이 하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교회에서 연예인들을 불러 공연하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제가 '딴따라' 끼가 있고요. 이렇게 매스컴을 활용하면서, 교인들은 제 철학과 열정으로 훈련시키는 거죠."

―어떤 철학을 갖고 있습니까?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거죠. 인간이 주인이 되면 교회 세습을 하게 되죠. 제가 카리스마가 있다는 말을 듣지만, 그럴수록 도덕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하루아침에 망합니다. 교회의 모든 일은 장로회의의 절차와 과정을 거쳐 투명하게 합니다. 저나 우리 교회 직원들은 세금을 내고 있고요,"

―등단한 시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시집 8권을 냈습니다. 제가 '윤동주 평전 시집'도 냈지 않습니까. 제가 약장사처럼 떠들어대도 지적인 면도 있습니다. 책 읽을 시간이 없으면 신문의 오피니언면은 꼭 봅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그는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 뒤 장문의 문자메시지를 네 차례나 보내왔다. 에너지가 철철 넘쳤다. 17일(현지 시각) 오후 미국 휴스턴 셰러턴호텔에서 '6·25 참전 용사 감사 행사'가 열렸다. 550명의 참전용사와 가족이 참석했고, 공화당 대통령 경선에 나왔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 등의 모습도 보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18/20170618022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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