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원 논설위원
이하원 논설위원

올 초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크게 논란이 된 것은 안희정 충남지사의 '선의(善意)' 발언이었다. 안 지사는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도) 선한 의지로 좋은 정치를 하려고 했다"고 발언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문재인 캠프는 그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문 대통령도 당시 "안 지사의 말에 분노가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이·박 두 전직 대통령에게 선의 표현을 쓰는 것 자체에 동의하지 않은 것이다. 이 사건은 안 지사의 욱일승천하던 기세가 꺾이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북한 김정은이 두 전직 대통령과는 달리 선의를 갖고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문 대통령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대해선 각각 양상군자(梁上君子), 후안무치(厚顔無恥)로 강하게 비판하며 불신감을 숨기지 않고 있다. 하지만 대선 기간 중 "(미국보다) 북한에 먼저 가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김정은과 대화할 가능성은 열어 두고 있다. 그제 신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 특보는 북한의 천안함 폭침 이후 시행 중인 5·24 제재 해제를 언급했다. 민간 교류 허용, 개성공단·금강산 관광 재개도 문 대통령과 논의하겠다고도 했다. 눈치 빠른 통일부 당국자들도 민간 교류를 본격적으로 재개하는 방안 검토에 착수했다.

북한이 금강산 관광객 사살,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목함 지뢰 도발, DMZ 총격 사건에 대해서 사과하려는 움직임은 전혀 없다. 오히려 지난해 두 차례 핵실험, 올해 8차례 탄도미사일 발사로 도발 수위를 지속적으로 상승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 정부가 취하려는 '달빛 정책'은 북의 김정은이 선의를 갖고 있다는 전제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가슴을 열고 다가서면 이에 화답할 것이라는 '햇볕 정책'을 그대로 닮았다. 그러나 형과 고모부를 화학무기와 고사포를 동원해 살해하는 그에게 선의를 기대하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중장거리 전략 탄도탄 '북극성 2형' 시험발사를 참관했다고 22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연합뉴스
무엇보다 이런 자세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와 부조화(不調和)를 이룰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11월 채택된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 2321호는 각국이 북한을 범죄 국가로 간주해 "북한 외교 공관 및 영사관 직원을 축소"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대량 현금(bulk cash)이 안보리 부과 조치를 회피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재강조한다"는 규정도 있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중국· 러시아도 찬성한 이 결의 어디서도 김정은 정권이 선의를 갖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김정은 정권을 절대 신뢰하지 말고, 북한에 이득 되는 어떤 일도 하지 말라는 촉구가 20페이지 넘게 담겨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일방적으로 5·24 제재를 해제하고 북한에 돈을 퍼주는 역할을 한다면? 우리가 수출을 통해 국가의 부(富)를 늘리고, 인적 교류를 통해서 품격(品格)을 높여가 야 할 국제사회에서 웃음거리가 될 뿐만 아니라 자칫 명백한 유엔 결의 위반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지금 새 정부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북한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대북 정책 틀을 만드는 것이다. 김정은에게 있지도 않은 선의를 믿고 무작정 평양으로 달려가는 정책은 현 정부는 물론 국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른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23/2017052303524.html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