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한국전쟁과 기독교' 출간
고종·日帝와 근대화 주도 경쟁… 광복 후엔 反共·勝共 내세워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 동력돼

한국 보수 세력의 강력한 기반 중 하나는 개신교이다. 그리고 개신교에서 영향력이 매우 큰 그룹이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西北) 출신 신자들이다. 평안도와 황해도는 19세기 후반 한반도에 들어온 개신교가 번성한 곳이고, 이 지역 개신교 신자들은 광복 후 남북한이 분단되자 대거 월남하여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주류 집단으로 부상했다.

윤정란 서강대 종교연구소 연구원이 최근 펴낸 '한국전쟁과 기독교'(한울아카데미)는 서북 개신교가 한국의 주도 세력으로 떠오르는 과정을 실증적으로 분석한 노작(勞作)이다. 그동안 서북 개신교에 대한 연구가 교회사적 관점에 입각하거나 일면적 비판에 치중했던 것과 달리 이 책은 20세기 한국사의 큰 흐름 속에서 균형 잡힌 시각으로 역사적 과정과 의미를 조명하고 있다.

왼쪽 사진은1909년 평양 장대현교회 앞에 선 교인들. 1894년 설립된 장대현교회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터전이었고, 3·1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광복 후 반공 투쟁의 선봉에 서는 등 서북 개신교의 중심 역할을 했다. 오른쪽 사진은 1983년 2월‘고당 조만식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는 한경직 목사. 한 목사는 일제시대 서북 개신교를 이끌었던 조만식 선생의 뒤를 이어 월남한 서북 개신교인들의 구심점이 됐다. /홍성사 제공·조선일보 DB[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왼쪽 사진은1909년 평양 장대현교회 앞에 선 교인들. 1894년 설립된 장대현교회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터전이었고, 3·1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광복 후 반공 투쟁의 선봉에 서는 등 서북 개신교의 중심 역할을 했다. 오른쪽 사진은 1983년 2월‘고당 조만식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는 한경직 목사. 한 목사는 일제시대 서북 개신교를 이끌었던 조만식 선생의 뒤를 이어 월남한 서북 개신교인들의 구심점이 됐다. /홍성사 제공·조선일보 DB[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책은 먼저 서북 개신교의 태동과 발전 과정을 사회사적 맥락에서 살펴본다. 조선시대 권력에서 배제됐던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들은 상공업에 뛰어들었고, 개신교가 전래되자 적극 수용했다. 교회·학교·유학을 통해 근대 지식을 흡수한 서북 개신교인들은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정치개혁 활동을 벌였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고종이 독립협회를 해산하자 애국계몽운동으로 방향을 틀어 민족운동을 주도했다. 1911년 일제가 민족운동가들을 잡아들인 105인 사건으로 기소된 신민회 회원 123명 중 116명이 서북 출신이었다.

일제시대 들어서도 서북 개신교의 근대 문명 건설을 향한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청교도 윤리에 입각한 인격주의를 내걸고 물산장려운동·청년운동·농촌운동을 전개하며 일제와 주도권 경쟁을 벌였다. 초기에는 안창호(1878~1938)가 구심점 역할을 했고, 조만식(1883~1950)이 뒤를 이었다. 시민사회를 지향하는 서북 개신교의 정치·사회 활동 중심은 평양YMCA였다.

광복이 되자 서북 개신교인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입각한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조선민주당·기독교사회민주당·기독교자유당이 잇달아 만들어졌다. 그러나 소련군과 공산당이 탄압을 가중해 조만식을 비롯한 상당수가 체포되거나 행방불명되자 검거를 피해 대거 월남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연구가 전개된다. 6·25전쟁 휴전까지 약 100만명이 월남했는데 그중 70%가 서북인이었다. 이들은 서북 지역 선교를 담당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을 장악하며 개신교계의 중심 세력이 됐다. 그리고 서북 지역의 민족운동을 계승하는 서북청년회를 만들어 목숨을 건 반공(反共) 투쟁의 선봉에 섰다.

월남한 서북 개신교의 구심점은 한경직(1902~2000) 목사였다. 오산학교·숭실전문을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유학한 그는 기독교사회민주당 조직을 주도했다가 남쪽으로 피신해 영락교회를 세웠다. 영어에 능통하고 미국 인맥이 강했던 그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월드비전 이사장을 역임하며 개신교뿐 아니라 사회 지도자로 부상했다. 영락교회는 200개 이상의 교회를 세웠고 군(軍) 선교를 주도했으며, 영락교회 청년회와 학생회는 서북청년회의 중심이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이승만 정권과 소원해진 서북 개신교는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잇달아 지지했다. 얼핏 모순으로 보이는 이런 결정의 배경은 그들이 이 시기 들어 '전투적 반공주의' 대신 '승공(勝共)'을 내세운 것이었다. 소련의 평화 공세와 북한의 재건 성공에 자극받아 맹목적 반공으로는 안 되고 민주주의 확립과 빈곤 제거를 통해 공산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반공과 경제성장을 함께 내건 군부와 서북 개신교의 결합은 한국의 산업화를 이루는 강력한 힘의 원천이 됐다. 군과 학계로 진출한 많은 서북청년회 출신이 연결고리가 됐고,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했던 대다수 한국인이 이들을 지지했다. 서북 개신교가 한민족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던 역사적 경험과 세계적 관계망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적 성공에 중요한 동력이 됐다. 한반도의 문명개화 선도를 열망했던 서북 개신교의 꿈은 이렇게 실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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