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의 정책이 잘못된 것은 비판해야 하지만 그것이 반미(반미)로 연결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의 우리사회에는 단순한 정책비판 정도가 아닌 ‘이념적·총체적 반미’가 실재한다는 대통령 차원의 인지(인지)인 셈이다. 그러면서 김 대통령은 ‘반미’는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미’ 문제에는 단순히 ‘국익에 산술적인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뛰어넘는 실로 엄청난 본질적 문제가 걸려있다. 이 논쟁에는 장래의 통일 민족국가의 기본성격을 둘러싼 사활(사활)을 건 이념투쟁이 잠재돼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과 ‘인민공화국’은 원래 ‘미국열차를 타느냐 소련열차를 타느냐’로 갈라진 분단국가였다. 소련권이 붕괴하자 그 선택에선 ‘남한은 성공, 북한은 실패’가 거의 확실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에선 참으로 이상하게도 남한의 그런 ‘선택’이 처음부터 크게 잘못되었다는 듯이 ‘반미’가 성행하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그것을 우려했다면 상황은 결코 간단치만은 않은 것 같다. 실제로 지금 가동중인 인터넷 ‘반미’ 사이트만 해도 부지기수이고, 다수국민들이 모르고 있는 사이에 ‘반미’는 이미 핵심적인 투쟁메뉴가 돼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휴전선 이북에나 있던 ‘반미’가 이제는 거기선 열중쉬어를 하고 남한에선 상종가를 친다면 그것은 확실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과 북한은 급속히 친하려 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도 서로 껴안으며 화해를 구가하고 있다. 그런데 남한 내부에서는 새삼스럽게 ‘반미냐 아니냐’의 싸움이 최신유행으로 불붙고 있다.

마치 미국·북한 사이의 ‘50년 싸움’, 남한·북한 사이의 ‘50년 싸움’이 이제는 몽땅 남한내부의 집안싸움으로 전위(전위)된 것 같은 양상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양새로 볼 때 ‘북한의 성공’ ‘남한의 실패’라 할 수밖에 없다. ‘미·북’ ‘남·북’의 관계개선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북한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남한에는 오히려 50년 전 같은 ‘정체성(정체성) 싸움’이 새롭게 복원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실소(실소)할 노릇이기 때문이다.

전쟁 중 미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를 보상하고, 미군의 폭격훈련으로 인한 지역주민의 피해를 없게 하라는 요구는 정부도 국민도, 그리고 미국도 이념적 ‘반미’로 보지 않는다. SOFA의 불평등 조항을 개정하고 환경규정을 신설하라는 요구도 너무나 정당하고 당연하다. 그리고 냉전이 끝난 이후의 미국 패권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다른 문명권들의 문화적 반발 같은 것도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민주화가 확대될수록 한국사회에서도 당연히 미국의 정책을 정당하게 비판하고 예리하게 지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권리행사로서 통용될 수 있다.

다만, 한반도 안팎에서의 우리와 미국의 전통적인 안보 동맹관계 자체를 ‘만악(만악)의 근원’인양 바라보는 ‘반미’만은 김 대통령의 말이 아니더라도 분명히 시대착오적인 도그마다.

인간세상에는 물론 다수가 ‘잘못된 것’으로 보는 주장도 일각에선 나름대로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다수가 ‘잘못된 것’이라고 배척하는 의견이 실험실의 ‘언더그라운드 문화’로서는 몰라도 대통령의 우려사항으로까지 돌출돼선 곤란하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까지 발전(?)하게 된 데는 그간의 정부의 ‘너무 낙관적인’ 한반도 정세관 탓도 있지 않았나 점검해볼 일이다. ‘햇볕’은 문제해결의 처방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문제를 안겨주는 ‘부담’이기도 하다.

지금으로선 그 ‘부담’을 북한은 털고 있고 남한은 몽땅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다. 북한을 녹이겠다더니 정작 녹고 있는 것은 남한 내부 아닐까.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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