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일 탈북 작가
림일 탈북 작가

지난 4월 30일 미 뉴욕 유엔(UN)본부 출입처에서 꼼꼼한 검사를 마치고 국제회의장에 들어섰다. 반원형 청중석은 각국 대표와 옵서버로 가득했다. 여기서 김정은 독재 정권을 뛰쳐나온 용감한 탈북자들이 북한 인권 상황을 고발했다. 필자를 비롯한 탈북자 20여 명도 방청객으로 참석했다.

가까운 곳에 동양인 남자 셋이 앉았다. 그들의 재킷 왼쪽에 붉은 김일성 초상화가 달렸다. 유엔 북한대표부 사람들이다. 결연한 낯빛이다. 왜 아니겠는가? "외교관들은 국제 무대에서 사회주의 정신을 고수하고 제국주의자들과 싸우는 대외 전사이고 외교 혁명가"라고 김일성이 말하지 않았던가?

영양 부족이 뚜렷한 마른 얼굴도 눈에 띄었다. 북한 외교관들은 터무니없는 월급으로 외식할 엄두도 못 내고 대개 대사관 안에서 콩나물비빔밥에 단무지, 야채 절임을 먹는다고, 서울에서 만난 외교관 출신 탈북자들은 증언했다.

북한 인권 상황을 고발하는 탈북자 증언이 시작됐다. 탈북해 2007년 미국에 온 대학생 조지프 김(25)씨는 12세에 아버지가 굶어 죽었고,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중국을 왕래하다 붙잡혀 감옥에 간 사연을 토로했다.

이때 필자 자리에서 다섯 줄 뒤에 앉은 북한대표부 이성철 참사관이 느닷없이 손을 들더니 준비한 성명서를 읽어 내려갔다. 사회자가 중단을 요구했으나 그는 "탈북자들은 조국을 버린 배신자들이며 이런 행사는 공화국을 흔들려고 미국 정부가 만들었다"면서 막무가내였다.

탈북자인 내가 조국을 버린 배신자라고? 필자가 유년 시절 받은 북한 고등교육에서 "조국은 곧 장군님"이라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장군님인 김일성과 그 자손은 누구인가? 민족과 영토 분단의 비극 6·25의 전범자 김일성, 무능한 정치로 1990년대 중반 300만 인민을 굶겨 죽인 김정일, 오늘도 한반도를 핵으로 위협하는 김정은이다.

탈북자에게 조국은 김정은 독재 정권이 군림하는 북한이 아니라 고향에 두고 온 부모 형제들이다. 우리는 가슴이 찢어지는 생이별을 한 그들을 마음에 담았지 절대로 배신하지 않았다.

화를 삭일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북한 외교관들 면전에 대고 "불쌍한 사람들이구먼. 변명하지 마!"라고 했다. 국제 무대에서 김정은의 대변인인 북한 외교관들의 더러운 민낯을 보며 내가 19년 전 쿠웨이트에서 등진 평양 독재 정권의 추악함을 재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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