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카라’에는 아침마다 꽃을 선물하던 여자의 쪽지가 클로즈업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엔 “당신을 알게 되서 너무나 기뻤고 영원히 기억할께요”라고 적혀 있지요. 그런데 이 장면은 철자법 오류로 감정을 반감시킵니다. ‘게요’를 ‘께요’로 적은 건 구어에 가까운 표현이라 그렇다 쳐도, ‘돼서’를 ‘되서’로 잘못 쓴 것은 거슬리는 표기였습니다.

‘쉬리’에서도 북한 테러리스트 박무영을 지칭하는 표현이 잘못 사용됐지요. 비밀요원들과 대책 회의를 열던 간부가 그를 “북한 특수 8군단의 재원”이라 말하는 대목이지요. 재원(재원)이 ‘재능이 뛰어난 여자’를 지칭함을 감안하면, 이건 실수였겠지요.

영화 속 실수는 몰입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됩니다. 단순 실수가 아니라 작품 전체가 비논리적이거나 횡설수설하면 설득력을 잃어 관객 반감을 사기 쉽고요.

그러나 실제 언어생활에선 잘못된 용어 사용이나 표기 실수가 얼마나 많은지요. 언젠가 한 배우와의 인터뷰 녹음 테이프를 들으며 토씨와 말더듬는 곳까지 살려 적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당연히도, 그 배우와 나눈 제 말들에 허다한 비문(비문)과 잘못된 용례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었지요. 우리 삶은 또 어떤가요. 일상에서 복선이나 필연 혹은 초점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지요. 삶을 영화에 견준다면, 아마도 그건 기본 작법도 모르는 아마추어 작가의 습작만도 못한 논리성을 지니고 있을 테지요.

말과 삶이 그렇지 않은데, 왜 우린 창작품들을 대할 때 흠결 없는 논리나 맞춤법을 요구할까요. 작품 평가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설득력이란 잣대는 삶의 구체적 전개 양상에서 가장 발견하기 어려운 원리일텐데 말입니다.

최근 비디오로 출시된 중국 영화 ‘책상서랍 속의 동화’는 수작이지만, TV 출연 한번으로 시골 학교를 둘러싼 어려움이 일거에 해소되는 결말은 너무 소박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감독 장이모는 “아이들에게 비관적 결말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며 “실제 생활에서 느닷없는 사건들이 얼마나 많은가. 매스컴 개입으로 확 바뀐 일도 많다”고 했지요.

그의 말에는 영화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정반대의 두 주장이 공존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삶의 느닷없음이 영화로 이어지면 왜 안되느냐는 항변이고, 또 하나는 삶이 비루하니 영화에서라도 희망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지요. 논리적으로 조금 어색할지라도 그의 말은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이율배반적으로 바라는 바를 정확히 요약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삶을 외면하지 않고 철저히 진실을 담는 ‘그릇’이기를 바라는 반면, 삶의 초라한 제약을 훨훨 넘어서는 꿈의 ‘날개’이기도 원하는 거지요.

영화의 이야기와 표현법에 대해 완전무결함을 원하는 것은 결국 일상에 대한 무력증과 분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스스로의 삶에서 누차 반복되는 잘못된 판단과 초점 잃은 행동, 삶을 뒤흔드는 우연에 신물이 날 때쯤 되면, 영화와 같은 창작물의 비논리성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할 때, 결점 없이 완벽하게 짜인 ‘걸작’들을 볼 때면, 역설적으로, 더더욱 서글퍼지는 건 어쩔 수 없네요. 황당한 3류 영화들의 비논리성을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는 날은, 아마도 영원히 오지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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