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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뺏기자 애국지사가 총으로 자결했던 땅 연해주
조선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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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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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시아 연해주, 그 땅과 그 역사

연해주(沿海州)는 흑룡강·우수리강 그리고 동해로 둘러싸인 땅으로 러시아 83개 연방지역의 하나인「프리모르스키(Primorskiy)지방」을 말한다. 면적은 약 16만 4700㎢로 러시아의 0.92%에 불과하나 우리나라의 1.6배 크기다. 80%가「시호테-알린산맥」등 산림지대이며, 평균기온은 1월 -20℃, 7월 +20℃이다.

인구는 약 200만 명으로 러시아 전체의 1.4%가 살고 있다. 주도(州都)는「블라디보스토크」로 약 62만 명이 살고 있고, 모스크바까지 9288㎞에 달하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종착지다. 두 번째로 큰 도시는 블라디보스톡 북쪽 약 112㎞에 위치한「우수리스크」로, 발해 유적지가 다수 분포되어 있는 이곳이 바로 연해주 고려인들의 본거지이며 일제강점기에 항일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연해주에는 22개군이 있는데 이중 가장 남쪽에 있는 것이「핫산군」이며, 핫산읍은 중국의 방천, 북한 두만강과 접경하고 있다. 핫산읍의 북쪽에서 동해 바다에 접하고 있는 마을이 인구 약 3500명의「크라스키노」로 옛 발해의 염주성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 두만강 철교(위)와 핫산역.

연해주는 북방기마민족이 세운 金·元·淸이 차례로 지배하였으나 16세기 들어서면서 러시아가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에 강한 집념을 보이며 진출하게 된다. 17세기 초 태평양 연안까지 진출한 러시아는 연해주 접경인 흑룡강 일대에서 청나라와 분쟁이 발생한다. 청나라는 1653년 흑룡강에서 러시아 공격에 실패하자 조선에 원병을 청했고 이에 따라 1654·1658년 2차례「나선정벌」이 이루어졌다. 러시아가 18세기 유럽지역 전쟁에 참가하면서 연해주가 소강상태였으나, 19세기 들어 러시아의 동방진출은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1858년 淸과「아이훈조약」을 체결하여 흑룡강 이북을 차지하고 우수리강 동쪽지역은 청나라와 공동관할지역으로 했다. 이어 1860년에는 淸과「베이징조약」을 체결하여 연해주는 러시아로 완전히 넘어가게 된다.

2. 연해주와 고려인, 그리고 한민족 근대역사

1863년 함경도지역 농민 13가구가 연해주로 이주한 이래「조러수호통상조약」 체결 등 러시아와의 우호적 분위기에서 한인 이주가 계속 늘었고, 1910년 일제의 조선강점을 전후하여는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지사의 망명·이주가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에도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대거 연해주로 이주했다. 이들은 한인마을을 형성해 살았는데, 지신허·연추 등이 바로 그곳이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한인 집단 거주지인 「신한촌」(「개척지」에서 이주한 지역)을 세웠다. 한민족의 본격적인 이주가 이루어진 것이다.
연해주는 두만강으로 한반도와 접하고 있는데 겨울에는 강이 얼어 이동이 쉽다. 연해주 남부는 지형·토질 뿐 아니라 나무와 야생화 등 식생이 우리나라 중남부 지역과 대단히 흡사하다. 이 또한 한인들의 이주가 늘어난 배경이 아닐까 한다.
 

   
 

1910년 일제의 강점 후에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연해주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이범진 초대 러시아 공사는 헤이그 밀사를 발벗고 후원했다. 1906년 이준·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톡에서 합류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도록 했고, 자신의 둘째 아들 이위종도 합류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라를 잃은 직후인 1911년 1월 세발의 총탄으로 자결했다.
“국권침탈은 저에게 목숨을 보전할 어떠한 희망과 가능성을 앗아갔습니다.”
그의 유서다. 1908년 최재형·이범윤·이위종 등은 연추(크리스키노)에서 의병단체 ‘동의회’를 결성하고, 1909년 동의회 소속 안중근 의사는 단원 12명과 함께 연추의 카리에서 왼손의 무명지를 끊어 조국 광복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한다. 비밀결사체 ‘동의단지회’다.
 

   
▲ 크라스키노의 단지 동맹비(위)와 연추마을.

1910년 의병부대인 ‘13도의군’, 1911년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한 ‘권업회’가 창설되고, 1914년에는 블라디보스톡에 대한 광복군 정부가 수립된다. 1919년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에 맞서 연해주 한인들은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회의를 설립했고, 그해 상해임시정부와 통합하게 된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이 요원의 불길같이 확산되자 1920년 4월 4~5일 일제는 연해주 한인 학살에 나서 잔인한 살인과 방화를 자행했다. 신한촌에서만 300인 이상이 죽었고,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도 이때 처형되었다. 하지만 연해주의 한인들은 일제에 대항하여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가운데 중국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러시아의 스탈린은 연해주에 살던 전체 한인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결정을 한다. 이유는 일본과 내통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 해 9~10월 2차례에 걸쳐 우수리스크 남쪽에 있는「라즈돌로예」역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옮겨졌다. 굶주림과 공포의 열차가 도착한 곳은 연해주에서 6000㎞ 떨어진 반사막 지대인 카자흐스탄 알마티와 인근지역,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남부지역이었다. 총 171,781명이 강제이주를 당했다. 이들은 처참한 삶을 영위했다 처음 2년간 1만2천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이 척박한 땅에 버려진 한인들은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해 소비에트 최고의 모범집단을 일궈내는 등 자립기반을 마련했다. 소련해체 후인 1993년 러시아는 고려인 명예회복 법안을 채택하여 고려인이 연해주로 가는 길이 열렸다. 현재 연해주에는 5만여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는데, 그 중 3만여 명은 재이주해 정착한 사람들이라 한다.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관)
 

   
▲ 한인의 강제이주 경로(지도·위)와 애환의 라즈돌로예 역사.

3. 연해주의 한민족 고대·중세 역사

연해주는 한반도와 가장 인접한 지역으로 고대로부터 한민족 역사의 무대였다. 이 지역의 고대 역사는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극동연방대학박물관에는 BC 1만5천년 전 구석기 유물이 있다. 이후 청동기시대를 거치면서 이곳은 고조선의 역사무대였을 것이고 이어 부여·고구려가 이어 받았다. 고구려는 668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으나 698년 발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중국사가들은 만주와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고대민족에 대해 시대별로 이름을 다르게 불렀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肅愼),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吉), 수·당대에는 말갈(靺鞨), 송·명대에는 여진(女眞), 청대에는 만주족(滿洲族)이라 불렀다. 특히, 발해 멸망 후 그 땅은 여진으로, 그 사람은 여진족으로 부른 것이다. 이 연해주 땅이 우리 역사와 깊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연해주에서는 발해 유적지가 계속 발굴되고 있다. 발해5경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대체로 동경용원부는 3대 문왕 후기부터 5대 성왕초까지 10년간 발해수도였고 그 위치는 두만강 인근 간도의 중국 흑룡강성 훈춘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동경용원부에 소속된 연해주의 크라스키노에서 발해의 성터와 독창적인 유물이 발굴된 바 있다. 특히 크라스키노(염주)는 일본으로 가는 해로(日本道)의 출발점이 된 곳으로 당시 활발한 대외활동을 말해준다.

발해 유적 중 크라스키노 성터는 (발해역사 규명에 있어) 기념비적인 발굴로 평가되고 있는데, 지금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이곳은 늪지를 지나야 하는 곳이나 다행히 겨울이어서 접근이 상대적으로 용이했다. 크라스키노 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2.5㎞를 가면 좌측으로 드넓은 습지가 나타난다. 이 습지를 고상버스를 타고 약 0.9㎞정도 남쪽으로 가면 철길을 만나고, 이 철길을 지나 수풀을 헤치고 걸어 1.8㎞ 정도 더 가면 발해의 염주성(크라스키노성터)에 이른다.

1960년 러시아학자가 이 성의 성격을 밝힌 이후 지금도 한·러 학자들이 발굴을 계속하고 있다. 성벽의 외곽과 세군데 성문·옹성의 흔적이 뚜렷하게 존재한다. 크라스키노에서 농업생산을 하는 한국「유니베라」의 현지 법인 법인장이 위성좌표로 어렵사리 현지까지 안내해 주었는데 학술탐사팀 외에는 첫 방문이라 귀뜸해 주었다. 우스리스크시 인근 발해의 솔번부에 해당하는 지역의 발해성터도 이번에 답사하였는데 지금도 해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연해주에는 니콜라예프카성터, 콕샤롭카유적지 등 수많은 발해시대 흔적이 남아있어 한·러 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우리의 고대사 연구가 진일보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 크라스키노 성터 현장(위)과 위성사진으로 본 크라스키노 성터.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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