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어 주한 독일문화원장
"南北 서로 잘 아는 게 중요… 독일 사례가 정답될 순 없어"

 
 
25년 전 11월 9일 장벽이 무너지던 날 베를린 풍경은 어땠을까. 1989년 서(西)베를린에 거주 중이던 주한 독일문화원장 슈테판 드라이어(56·사진) 박사는 6일 본지와 만나 "장벽 붕괴는 환희에 찬 순간이지만, 사람들 머릿속의 벽은 수십년 더 유지됐다"고 했다.

서독에서 자란 드라이어 원장은 당시 서베를린 독일문화원에 근무 중이었다. 드라이어 원장은 "생방송 TV 토크쇼를 시청하는데, 출연 중이던 서베를린 시장이 갑자기 '나가봐야겠다'고 일어났다"며 "무슨 일이 났구나 싶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날 귄터 샤보프스키 동독 공산당 대변인이 동·서독 여행 자유화 조치가 "지금부터" 시작된다고 잘못 밝히는 바람에 '무슨 일이 생길 것'이란 소문이 파다한 상태였다.

장벽 근처에는 궁금증에 모여든 수만 명이 웅성거렸고, 당황한 보초는 국경을 열었다. 모두 얼떨결에 일어난 기적에 환호를 보냈다. 서독인은 동쪽으로, 동독인은 서쪽으로 건너오면서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기 시작했다.

드라이어 원장은 "독일 통일 전 서독민은 동독 정권은 싫어했지만, 동독 주민에 대해서는 존중과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공산 독재에 대해 동독민이 "당신들이 아닌 우리가 국민이다"라고 맞서는 모습을 언론으로 접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 해 6월의 중국 톈안먼 사태 같은 유혈 진압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벌어진 라이프치히 평화 시위는 서독인에게 깊은 감동을 줬다고 한다. 드라이어 원장은 "한국도 북한과 민간 교류를 늘리고 서로 알아가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다.

25년 간극이 하루 만에 사라진 건 아니었다. 생필품을 사러 온 동독인들 때문에 서독 쪽 도로가 벤츠, BMW 대신 '트라비(동독 국민차)'로 마비되자 볼멘소리를 했다. 서로 달라진 말도 많아 동·서독 단어 사전이 필요할 정도였다. 서독인은 상대를 "항상 우는소리만 하는 오시(Ossi·동독인)"라고 깔봤고, 동독인은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려 드는 잘난 베시(Wessi·서독인)"라고 빈정댔다. 드라이어 원장은 "이런 오시·베시 논쟁은 1990년대 중반 절정을 이룬 뒤, 이후 동·서독 격차가 줄어들면서 천천히 사그라졌다"고 했다.

드라이어 원장은 "한국도 독일처럼 역사적 기적을 겪길 바란다"면서도 "독일에서 한반도 통일의 답을 찾을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한국은 주변국과 통일에 대한 이견이 있고, 북한과 과거 전쟁을 치른 반면, 동독에서는 주민들의 평화 시위로 정권이 무너지는 등 크게 다른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한국인이 독일에서 통일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며 "독일을 참고하되, 답을 찾지는 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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