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實勢 방문의 본질은 체육 행사 참석
남북관계 어디로 흘러갈지 점치기 힘든데도 벌써부터
5·24는 惡, 정상회담은 善이란 섣부른 주장이 쏟아져

박두식 논설위원
박두식 논설위원
북한 문제를 파고들다 보면 종종 '북한은 왜?'라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된다. 북한 실세(實勢)들의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 참관 역시 마찬가지다. 북한이 왜 이 시점에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 최룡해·김양건 노동당 비서를 한국에 보냈는지에 대해서 누구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여러 추론과 희망 섞인 관측들만 난무할 뿐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숱한 가설과 풍문, 이념과 정파적 바람이 뒤섞여 있는 온갖 전망과 주장 사이에서 사실(事實)을 먼저 가려내는 일이다. 그래야 오류(誤謬)를 최소화할 수 있다.

북한 대표단은 12시간 남짓 인천에 머물렀다. 남북 회담이 열렸지만 눈에 띌 만한 합의는 없었고 남북관계를 잘 꾸려가자는 수준의 덕담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이들이 평양을 떠나는 시간에 맞춰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제17차 아시아 경기대회 폐막식에 참가하기 위하여 황병서 동지가 비행기로 평양을 출발했다"고 전했다. 북한 발표 어디에도 '인천'이라는 말은 없었다. 북한 매체들은 이들이 북으로 돌아간 뒤에도 남북 대화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북한 TV가 북한 선수단의 평양 도착을 중계방송하는 등 아시안게임에서 거둔 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는 집권 후 자신의 아버지 김정일이 영화·예술 분야에 몰두했던 것처럼 스포츠에 매달리고 있다. 2011년 신년사설에서 "온 나라에 체육 열풍을 일으켜 축구 강국, 체육 강국으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하더니 이듬해 12월 당 중앙위·중앙군사위의 공동 구호에 '축구 강국·체육 강국'을 넣기도 했다. 2012년 11월엔 아예 '국가체육지도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 기구의 초대 위원장이 김정은의 손에 처형된 고모부 장성택이다. 장의 숙청에 앞장서면서 실세로 떠오른 최룡해가 현재 국가체육지도위원장을 맡고 있고, 당과 군의 실력자들이 대거 들어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북이 역도와 여자 축구 등에서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둔 북 선수단의 선전(善戰)에 흥분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김정은의 치적(治績)으로 내세울 만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북 대표단의 인천 방문은 내부 홍보용 체육 행사 참석이 본래 목적이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 측에 전한 메시지는 일종의 보조(補助) 메뉴였다. 황 일행이 박근혜 대통령 면담 제안을 거절한 것이나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재개 등 주요 현안에 대해 아무런 입장도 내놓지 않은 것 역시 이런 흐름과 일맥상통한다.

물론 북한 실세들이 한국을 찾아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밝힌 것의 의미를 굳이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정도 수사(修辭)는 과거 남북 접촉에서도 익히 듣던 내용들이다. 북 대표단이 다녀갔지만 정작 남북관계가 어디로 흘러갈지는 현재로선 예측하기 어렵다. 이번에 나온 합의는 10월 말~11월 초에 2차 고위급 회담을 갖는다는 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 내부에선 벌써부터 5·24 대북(對北) 제재를 해제해야 한다거나 늦어도 내년 중에는 남북 정상회담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까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야당과 좌파 성향의 전문가들도 북 대표단의 방한 이유 중 하나로 북이 처한 국제적 고립을 꼽고 있다. 거꾸로 뒤집으면 북의 핵·미사일 도발에서 비롯된 대북 국제 제재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북한은 이 상황에서 탈피하기 위해 올 들어 고위급 인사들을 유럽과 러시아·미국 등에 보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5·24 제재가 천년만년 지켜야 할 철칙(鐵則)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5·24를 폐기해 대북 국제 제재의 틀을 무너뜨려야 할 만큼 중대한 변화를 맞은 것인지 되묻고 싶다. 남북관계가 아직 첫걸음도 떼지 못한 상태에서 말이다. 남북 정상회담만 해도 과연 김정은이 응할지조차 알 수 없다. 김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정상회담을 한 적이 없다. 중국마저 고모부를 처형하고 핵·미사일이나 만지작거리는 나이 서른의 김정은을 만나주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내부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나오는 남북 정상회담 주장을 북은 어떻게 볼 것이며, 국제사회는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이런 주장들은 5·24는 악(惡)이고, 남북 정상회담은 절대 선(善)이라는 희한한 발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5·24를 부른 것은 북의 천안함 도발이었고, 남북 정상회담은 남북관계를 전진시키기보다는 우리 내부를 극심한 혼란과 갈등 속으로 밀어넣은 측면이 더 강하다. 이것 역시 남북문제를 사실관계와 전후 맥락 등을 엄밀히 따지기보다는 감성과 유행, 이념, 정파적 이해관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잘못된 접근이 빚어낸 결과다.

북측 고위급 인사 3명의 12시간 나들이 이후 우리 내부는 마치 선무당들의 굿판이라도 선 듯한 분위기다. 이 나라가 과연 통일에 이르는 길고도 어려운 과정을 제대로 헤쳐나갈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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