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관계가 뜻밖의 전기(轉機)를 맞았다. 북한 권력 서열 2위로 평가되는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과 최룡해·김양건 노동당 비서 등 북한 고위급 대표단 11명이 4일 전격 방한해 우리 측 정홍원 국무총리와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류길재 통일부 장관 등과 회담을 가졌다. 북은 그 바로 직전까지 박근혜 대통령과 대한민국을 향해 온갖 비방과 독설을 퍼부어왔다. 불과 며칠 전"당분간 남조선 당국과 대화는 없다"고 공언했었다. 그랬던 북한의 핵심 실세들이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에 참석하겠다면서 대거 한국을 찾은 것이다. 우리 정부 관계자들이 "깜짝 놀랐다"고 할 만큼 예상치 못했던 반전(反轉)이다.

북측은 이날 "2차 남북 고위급 회담을 10월 말~11월 초에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북은 지난 두 달 가까이 우리 측의 고위급 회담 제안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병서 총정치국장은 "이번에 좁은 오솔길을 냈는데 앞으로 대(大)통로로 열어가자"고도 했다. 북한 대표단은 12시간가량 인천에 머물며 남북 관계가 드디어 해빙(解氷)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 아니냐는 기대를 갖게 할 만한 발언을 이어갔다.

이번 북한 대표단은 여러 면에서 파격적이다. 황병서·최룡해·김양건은 2013년 말 김정은이 고모부 장성택을 숙청한 이후 최고 실세로 떠오른 인물들이다. 김정은은 이들이 자신의 전용기를 이용하도록 했다. 외형상 김정은의 특사(特使)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작 북 대표단이 가져온 메시지는 남북 2차 고위급 회담에 나오겠다는 것 말고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통일부는 이번엔 이산가족 상봉 재개를 비롯한 남북 간 현안에 대한 논의도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북측은 우리 측이 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원하는지를 적극 타진했지만 "시간상 어렵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따라서 지금의 남북 관계는 새로운 시작을 향한 출발선에도 아직 이르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 북은 지금껏 남북대화를 대남 공세의 수단 중 하나로 여겨왔다. 북의 이런 과거 전술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어렵게 만들어진 남북 관계 개선의 기회를 살려 나가려면 북의 진의(眞意)와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 급선무다.

북 대표단의 방한 배경을 놓고 정부와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여러 의견이 나오고 있다. 김정은은 현재 한 달 가까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 권력의 2인자급 인사들을 대거 한국으로 내려보내도 김정은이나 북한 체제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북핵과 인권 문제 등에서 비롯된 북의 외교적 고립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50년 넘게 북한의 후원자 역할을 해 온 중국마저 더 이상 북을 일방적으로 두둔하지 않고 있다. 북이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남북대화 카드를 뽑아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남북대화가 시작되면 북은 우리의 대북 지원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이 크다. 북 대표단은 2007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과 만나 대규모 북한 지원 방안이 담긴 10·4 공동성명을 내놨던 날짜에 맞춰 한국을 찾았다. 그러나 본격적인 남북 경협(經協) 논의에 앞서 북의 천안함 도발 사과와 재발 방지 방안 마련 등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현안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우리 측이 남북대화에 소극적으로 임할 이유는 없다. 박근혜 정부도 그간 북한과 대화할 뜻이 있다는 점을 거듭 밝혀왔다. 북의 도발 가능성에 철저히 대비하면서 분단(分斷) 상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이 나라의 안보·번영에 직결된 중대사다. 그러나 남북 관계 개선은 하루아침에 이뤄지기 어렵다. 미국·중국 등 국제사회와의 조율이 필수적이다. 북한 대표단 깜짝 방문에 들떠 지속 가능하지 않은 남북 관계 개선을 서둘러 추진하기보다는, 당장은 힘들더라도 차근차근 남북 간의 신뢰를 회복해가는 단계적·점진적 접근이 필요하다. 정부는 남북 관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 더 나아가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큰 구상과 원칙 속에서 북한과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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