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熙相
/ 미국 RAND 연구소 선임 객원 연구위원·예비역 육군중장

지난달 부시 미국 대통령의 방한(訪韓)을 전후해 우리 사회는 내부적으로 ‘남남(南南) 갈등’이라는 홍역을 앓았다. 이젠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긴 하지만, 남남갈등은 한·미(韓·美)관계에 오랫동안 씻기지 않을 앙금을 남겼다.

냉철하게 따져보면 부시 대통령이 방한에 앞서 연두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악(惡)의 축’이라고 했다고 해서, 한국이 지나치게 흥분하는 것은 조금은 비이성적이다. 우선 북한 체제를 가리켜 “주민을 굶주리게 하면서, 미사일과 대량 살상 무기나 개발하고 있다”고 밝힌 부시 대통령의 발언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동의할만한 지적이다.

국제 테러리즘 역시 거의 온 세계가 다 같이 괴로움을 당해온 증오의 대상이다. 북한이 1950년대 말부터 국제 테러리즘에 적지 않은 자금과 무장, 훈련지원 등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종교적인 성향이 강한 부시 대통령에게는 지금의 북한 체제가 이란, 이라크보다도 더 악(惡)처럼 느껴졌을 지 모른다. 결국 이런 말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원인 제공자로서 북한이 1차적 책임을 갖는다.

또 부시 대통령의 국정 연설이나, 뒤이은 대북(對北) 발언들은 북한을 향한 ‘선전포고’라기보다는, 다른 목적을 갖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북한을 대화의 광장으로 이끌어 내기 위한 강한 압력성 포석임이 눈에 띄는 것이다. ‘대화’를 위해 ‘위협’을 활용하는 일은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다. ‘악의 축’이라는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용어는 ‘국제 테러리즘과의 전쟁’에 임하는 미국의 목표와 성격을 분명히 규정하고, 국제적 테러리즘과 대량 살상무기의 개발 및 확산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강한 의지를 세계에 과시하기 위한 언어적 장치였다.
결국 지난 1개월여 이상, 부시 대통령을 포함한 미 정부 당국자들의 ‘입’에서 나온 발언들은 결코 간단치 않은 계산과 전략적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동맹국의 전략적 움직임을 헤아리기에 앞서, 한국이 앞장서서 ‘전쟁 위험’ 운운하면서, 마치 북한은 평화를 위한 동맹국인 반면 미국은 호전적인 적국(敵國)인 양 몰아붙이고 ‘반미(反美)’를 선동하는 것은 결코 적절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없다.

한국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동맹국의 세계 전략이자, 대북 전략을, 우리가 나서서 훼방놓은 셈이 됐는데, 그것이 과연 타당하고 현명한 일이었는지 지금도 의문스럽다. 이런 지적은 결코 미국을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과연 한국이 희망하는 대로 미·북 관계가 개선되어 한·미·북의 3자 관계가 정 삼각형을 이룬다면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되는가. 솔직히 미국은 남북한을 동시에 통제할 수 있게 되는 만큼 오히려 만족스러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햇볕정책 외에는 대안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강조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국 국민 중에는 “북한 정권과 주민을 분리 대응하겠다”는 부시의 정책에 공감하는 사람이 상당하다. 또 “(북한과 같은) 정권이 분배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한, 외부로부터의 원조는 그 정권의 주민에 대한 억압만을 강화시킬 뿐”이라고 단정하는 미국의 북한 전문가 척 다운스의 의견에 공감하는 사람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이제 햇볕정책은 그 마무리에 신경을 쓸 단계다. 그간 성과도 적지 않았으니 그것을 온전히 하는데 그치고, 대신 이 때문에 손상된 한·미 우호관계를 회복하고 더욱 따뜻이 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한·미 우호 관계는 한국 대외관계의 대들보요, 국방의 3대 지주이며, 한국의 생존과 통일은 물론, 그 이후의 튼튼한 안보를 위해서도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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