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탈북 아이들 꿈이 동사무소 직원… 주민증 받을 때 가장 기뻤대요"

외국인 노동자 돕다 탈북자 돌보다
중국 버스에서 본 60代 탈북자… 공안이 들이닥쳐 오랏줄로 '꽁꽁'
눈이 딱 마주쳤는데 아무것도 못해 쾅하고 충격… 인생 행로 바꿨죠

탈북 아이들이 '통일의 미래'다
1997년 死線 넘어 南에 온 탈북자들… 2년뒤 보니 애들은 학교 중퇴하고 어른은 신용불량자가 돼 있더라
이 때 결심했죠… '학교를 열자'라고

1997년 12월 초 13명의 탈북자 이야기가 국내에 알려져 파문을 일으켰다. 탈북자 13명이 중국 동북 지역을 출발해 7000㎞를 강행군한 끝에 제3국을 통해 국내로 입국하려 했지만 한국 대사관의 외면, 중국과 제3국의 '핑퐁'식 떠넘기기로 현지 국경에서 9명이 실종된 사건이었다.

당시 언론에 탈북자들의 대장정을 기획하고 이끈 주인공으로 '통일강냉이'라는 단체와 한 선교사가 등장한다. 실제로는 현장에 3명의 동료가 더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조명숙(44)씨. 서울 남산에 있는 탈북 청소년을 위한 고등학교 과정 대안학교 '여명학교' 교감이다.

"1997년 10월 중국에서 탈북자 13명을 데리고 제3국으로 가기 위해 국경을 넘는데, 내 역할은 제3국 쪽 국경수비대 시선을 딴 데로 돌리는 것이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파란색 아이섀도를 짙게 칠했다. 그런데 하필 걸어 들어간 곳이 지뢰 지대였고 곧 군인들에게 잡혀버렸다."

지난 26일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이 학교 건물 지하 1층 미술실에서 탈북 청소년이 그린 그림 앞에 앉았다. 이 그림은 중국 공안에 잡힌 여학생이 오랏줄에 묶인 채 북송당하는 장면이다. 여학생 뒤에는 공포의 대상인 북한군이 언제 어디서든 지켜보고 있다는 듯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탈북 청소년들은 이런 장면이 등장하는 악몽을 많이 꾼다. / 김지호 기자
지난 26일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이 학교 건물 지하 1층 미술실에서 탈북 청소년이 그린 그림 앞에 앉았다. 이 그림은 중국 공안에 잡힌 여학생이 오랏줄에 묶인 채 북송당하는 장면이다. 여학생 뒤에는 공포의 대상인 북한군이 언제 어디서든 지켜보고 있다는 듯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탈북 청소년들은 이런 장면이 등장하는 악몽을 많이 꾼다. / 김지호 기자
그와 좀 떨어진 곳에서 월경을 시도하던 탈북자들도 두 번째 초소에서 발각됐다. 작전이 드러날까 두려워 조명숙은 "나만 영어를 한다"고 나섰다. 밤새 군인 10여명에게 둘러싸여 심문을 받았다.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무서운 분위기였다. 당시 그는 27세, 결혼한 지 6개월밖에 안 됐을 때였다. 남편이자 동료 활동가인 이호택씨는 중국 쪽에서 상황을 챙겼다.

"한 군인이 나를 옆방으로 끌고 갔다. 침침한 조명 아래 침대 하나가 있었다. 절망적이었다. 하나님이 이런 피까지 필요하신 건가.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담이 커지더라."

조명숙은 용기를 내 주머니를 뒤져 20달러를 그 군인 손에 쥐여주었다. 군인은 웃으면서 방을 나갔다. 문이 열리는 순간 경악했다. 밖에는 아까 그를 심문했던 군인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조명숙은 그들에게도 차례로 돈을 쥐여줬고, 결국 탈북자들과 함께 풀려날 수 있었다. 이렇게 힘들게 구출한 탈북자들을 한국대사관으로 데려갔는데 관련국들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바람에 9명이 실종됐다.

조명숙 부부는 몇 달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6개월 넘게 수소문한 끝에 실종 탈북자를 모두 찾아냈다. 이듬해 8월까지 남한행을 포기한 부부를 제외하고 7명을 모두 한국으로 입국시켰다.

"그렇게 어렵게 한국에 데리고 온 사람들과 2년 동안 연락을 안 했다. 부담 주지 않으려고. 나중에 보니 애들은 학교를 중퇴했고 어른들은 신용불량자가 됐더라. 북한에선 당이 다 결정해서 학교 보내주고 취직시켜줬는데 여기선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해야 하니 적응을 못 했던 거다. 한두 개 몰라야 물어보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물어볼 엄두가 안 나더란다. 그래서 이들을 위한 학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2004년 여명학교 설립… 궁금증이 없는 학생들

학교를 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탈북자를 위한 활동은 성과가 없다는 패배주의가 퍼져 있었다. 가능한 일이라는 걸 보여줘야 했다.

"2002년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20세 탈북 여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듬해 학생 한 명이 더 늘었다. 지하방을 얻어 '자유터'라는 야학을 시작했다."

주변에선 얼마 안 가 그만둘 거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는 사이 학생 수는 30여명으로 늘었다. 주변의 시선도 달라졌다. 2004년 교회와 후원자,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통일의 새벽을 연다'는 뜻을 가진 여명학교를 열었다. 여명학교 재학생은 현재 94명. 그중 23명은 부모가 없다.

―탈북 학생만을 위한 학교가 꼭 필요한 것일까.

"만일 우리 보고 지금 북한에 가서 살라면 6개월 내에 정치범 수용소에 가게 될 거다.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도 학교 다니기를 힘들어 한다. 그런데 어떻게 탈북 청소년들이 적응하겠나. 탈북 청소년들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아이들이다.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품고 있다. 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보호와 치유도 병행해줄 공간이 필요했다."
지난 2011년 여명학교 입학생 오리엔테이션 때 찍은 사진. 당시 조 교감이“이렇게 견디고 살아 와 줘서 고맙다”고 말했더니, 한 여학생이 조 교감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 조명숙 제공
지난 2011년 여명학교 입학생 오리엔테이션 때 찍은 사진. 당시 조 교감이“이렇게 견디고 살아 와 줘서 고맙다”고 말했더니, 한 여학생이 조 교감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 조명숙 제공

―보호와 치유가 필요하다니.

"낮에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언뜻 보고 '이 애들에게 무슨 상처가 있겠어'라고 할지 모른다. 밤이 되면 달라진다. 이상한 잠꼬대를 한다. '엄마 피해, 숨어, 도망가' 그런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한 상처가 있는데 그 위에 옷만 입혀 놓은 꼴이라고 할까. 반갑다고 껴안으면 그 상처를 눌러 고통을 주게 된다. 어제까지 별의별 농담을 다 하며 잘 지내다가도, 천안함·연평도 사건이 터진 뒤 '야, 너희 삼촌이 했냐'라는 농담 한마디에 패닉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도 한국에 왔으니 이곳 교육에 익숙해져야 하지 않을까.

"상처를 먼저 치유하지 않으면 공부를 계속할 수 없다. 지식을 줘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눈앞에서 아버지가 처형당하는 걸 본 아이의 마음속 상처가 그대로 있는데 무슨 공부를 하겠나."

―그런 상태라면 수업을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공부 잘 하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가 있다. '북에 있는 엄마가 결핵에 걸렸다' '가족이 보위부에 잡혀갔다'는 전화를 받은 거다. 그런 일이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있다. 북한과 휴대전화로 실시간 전화를 할 수 있게 된 걸 아이들은 '과학이 혁명한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 혁명 때문에 아이들의 가슴이 찢어진다. 도울 방법이 없는 것이 더욱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거다."

―북한 학생들이 정말 다르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

"이 아이들이 한 번도 궁금증이란 걸 가져보지 않은 것 같다고 느낄 때이다. 우리는 사고력과 창의력을 키운다고 난리다. 이 애들은 질문을 하면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요. 내가 배우려고 여기 온 학생 아닙니까. 선생님이 답을 얘기해 주셔야지'라고 한다."

◇"주민등록증 주는 동사무소 직원 되고 싶어요"

―탈북 청소년들은 어떤 꿈을 갖고 있나.

"동사무소 직원이라는 애들이 꽤 있다. 신분증이 없어 감금당하고 고생했던 아이들이다. 학교 가고 직장 갖고 결혼하는 일상이 이 아이들에겐 기적이 일어나야 가능한 일이었다. 안전하게 보호받는 한 사회의 일원이 된다는 건 기적이다. 주민등록증은 그것을 상징한다. 자기가 가장 기뻤던 순간이 주민등록증을 받을 때였으니, 주민등록증을 주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여명학교의 교육법은 특이하다. 수업 시간은 45분, 일반학교보다 5분 짧다. 2교시가 끝나면 10분간 '업간(業間) 체조'를 하고 매주 금요일 오전엔 남산을 한 바퀴 뛴다. 다들 체력이 약하다.

―영양 상태가 부실해서인가.

"아이들이 축구를 하다가 뼈가 자꾸 부러진다. '고난의 행군' 때 태어났거나 혹은 그때 갓난아기였던 학생일수록 심하다. 그래서 수시로 아이들을 병원에 데리고 간다."

'고난의 행군'은 김일성 사망 이후 자연재해 등이 겹치면서 식량이 부족해져 북한 주민 수십만명이 굶어 죽은 시기이다. 1996~97년 절정을 이뤘다.

대안학교 설립 과정에서 부딪힌 장애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임대 건물에서는 학력을 인정받는 학교 설립 인가를 받을 수 없었다. 6년간 줄기차게 싸웠고 결국 인가를 받는 데 성공했다.

―여명학교가 고등학교 과정을 인가받았으니 아이들에겐 좀 여유가 있겠다.

"학력을 인정 못 받으면 검정고시를 봐야 한다. 짧은 시간에 많은 걸 단순 암기 하는 것이라 시험이 끝나면 다 잊어버린다. 하지만 이젠 이 학교에 다닌 것만으로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으니, 남한 적응 교육도 할 수 있게 됐다."
지난 19일 조명숙 교감이 남산이 내다보이는 여명학교 교실 창가에 앉아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언젠가 남북한 학생 모두가 행복한 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 이덕훈 기자
지난 19일 조명숙 교감이 남산이 내다보이는 여명학교 교실 창가에 앉아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언젠가 남북한 학생 모두가 행복한 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 이덕훈 기자

―남한 적응을 위한 교육 과정은 구체적으로 뭘 말하나.

"북한에선 스포츠를 가르칠 때 '이기는 게 도덕'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승리를 위해 뛴다. 그런 아이들에게 체육 활동뿐 아니라 규칙과 스포츠맨십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걸 모르고 통일 시대를 맞으면 교육은 큰 혼란을 겪을 거다."

―이 학교가 통일을 준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인데.

"중국에서 탈북자 돕는 일을 했을 때 통일이 곧 온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현장에선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촉이 발달한다. 탈북자 학교를 통해 많은 걸 배우고 준비할 수 있다. 하지만 여명학교가 갈 길은 아직 멀고 험하다. 탈북자 중 일부만 북한에서 마친 교육 과정을 인정받고 있고, 여명학교는 일반 학교와 달리 교원 인건비 등을 국가에서 지원받지 못하고 있다."

◇1970년대 어린시절… 빈민 출신, 어머니의 인정(人情)을 물려받다

조명숙 교감은 자신이 빈민 출신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돈을 벌지 못했다. 방 하나인 판잣집에 여섯 식구가 살았다. 학교에 들어가서야 남들은 하루에 밥 세 끼를 먹는다는 걸 알았다.

―세상에 대해 적대감도 컸을 것 같은데.

"대통령 선거 때마다 우리 동네가 TV에 나왔다. 대통령 후보가 저소득층 거주지를 방문해 운동화를 주고 갔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엔 신기하고 좋았지만 클수록 자존심이 상했다. 반항도 했고 방황도 했다. 공부는 당연히 못했다."

그가 열살 때쯤 어머니는 막걸리 장사를 했다. 막걸리 한 잔에 200원 하던 시절이다. 시인 천상병이 단골이었다. 어머니가 아플 땐 어린 딸이 대신 장사를 했다. 어머니는 딸이 술 파는 것이 싫어 그가 중학생이 되자 가게를 접고 공장에 취직했다.

―어머니가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살림이 그렇게 어려운데도 어머니는 걸인이 오면 항상 따뜻한 밥을 해줬다. 내가 고등학생 때 어머니가 구멍가게를 했는데 그때도 물건 대주는 사람, 우체부에게 모두 밥을 해 먹였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왜 그러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나중에야 그게 인생을 재미있게 사는 방법이란 걸 알았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기질은 어머니를 닮았나 보다."

그가 어렵게 대학을 간 건 어머니의 비수 같은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가 고3 때 어머니는 딱 한마디 했다. '나처럼 고생하며 살지 않으려면 대학에 가라.' 이 말이 가슴에 콱 박혀 삼수 끝에 단국대 한문교육학과에 합격했다.

대학 3학년 때 집으로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은 게 그의 인생을 바꿔놨다. 어느 날 무심코 전화를 받았더니 외국인이었다. 그가 떠듬떠듬 영어를 하자, 그 외국인은 병원에 입원한 친구를 꼭 도와달라고 했다. 그들은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세상엔 자신보다 훨씬 더 불쌍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게 활동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어떤 일을 했나.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는 산업재해를 당해도 보상을 못 받았다. 이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도록 데모도 많이 했다. 2~3년 뒤 이들도 산재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보상은 3년 소급 적용이었다. 이미 모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찾아 동료들과 함께 동남아 각국을 돌아다녔다. 나는 필리핀에 가서 수십명을 찾아냈다.

◇1997년 결혼… 신혼여행 때 만난 탈북자

외국인 노동자 돕는 일이 4년쯤 됐을 때 동료 활동가 이호택씨와 결혼했다. 신혼 여행지는 중국. 탈북자와 운명적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신혼 여행지를 중국으로 택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당시 조선족 상대 사기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였다.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도 비자가 없어 맘대로 들어올 수 없는 시대였다. 이걸 이용해 한국으로 보내주겠다고 사기 치고 돈만 챙겨 달아나는 사건들이 많았다. 남편을 중심으로 2년 정도 억울한 사연을 접수하여 해결하는 일을 했다. 신혼여행 7박8일 중 절반은 여행하고 나머지는 조선족을 만나 현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중국으로 간 거다."
2012년 2월 21일 서울 효자동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탈북자 강제 북송 반대 집회에서 여명학교 학생들을 안아주고 있는 탤런트 차인표씨의 모습. 이날 집회에는 개그우먼 이성미, 가수 황보·소이, 배우 리키 김 등 연예인 20여명도 동참했다. / 정경열 기자
2012년 2월 21일 서울 효자동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탈북자 강제 북송 반대 집회에서 여명학교 학생들을 안아주고 있는 탤런트 차인표씨의 모습. 이날 집회에는 개그우먼 이성미, 가수 황보·소이, 배우 리키 김 등 연예인 20여명도 동참했다. / 정경열 기자

―그런데 어쩌다 탈북자를 만나게 된 건가.

"조선족 동포들이 정말 어려운 사람들이 있는데 꼭 만나달라고 했다. 솔직히 북한 사정은 잘 몰랐고, 그저 몇 명 어려운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쾅 하고 충격을 받은 거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길래.

"죽음의 그림자가 붙어 있는 모습들이랄까. 굶어 죽는 가족을 지켜본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외국인 노동자와 탈북자 중 누굴 위해 일할지 선택하는 상황이 된 건가.

"외국인 노동자들이 성폭행·구타·산재로 고통받는 걸 보면 늘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인류애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도왔다. 그런데 탈북자는 좀 달랐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남의 일 같지 않았다. 6·25 전쟁 때 우리 할머니가 북쪽으로 피란을 갔다면 내가 그 사람일 수 있는 거다. 그냥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행하러 갔던 부부는 일단 중국에 눌러앉았다. 조명숙과 동료들은 산속에 움막을 치거나 시내에 아지트를 구해 탈북자들과 같이 살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버스를 타고 가는데 중국 공안이 들이닥쳐 60대 노인을 오랏줄로 묶었다. 누가 봐도 탈북자였다. 얼굴에 기름기 하나 없고 옷은 20년도 더 된 낡은 군복이었다. 눈이 딱 마주쳤는데 인간의 눈이 그렇게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 줄 몰랐다. 그는 살려달라는 말을 못했고, 나는 살려준다는 말을 못했다."

조명숙은 남편과 의논했다. 탈북자 돕는 일에 뛰어들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한번 시작하면 목숨을 내놔야 하는 일, 상황은 절박했다. 북한 주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중국 국경을 넘고 있었다.

―그들을 어떻게 도왔나.

"살게 해주는 거다. 국경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안전지대로 와서 건강 회복하게 해주고, 돈이나 식량을 줬다. 90% 정도는 이런 지원을 받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

―적잖은 돈이 들었을 텐데.

"결혼 자금도 털어서 썼고 결혼반지도 팔았다. 친구와 지인들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양희창 간디학교 교장은 적금을 깼고, 법륜 스님, 김진홍 목사 등도 힘을 보탰다."

―중국 공안의 단속과 감시도 심했을 텐데.

"외국인 노동자 돕는 일을 하면서 조선족 교포 사기 사건을 접수한 게 1만건이었다. 우리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곳곳에 있으니 그들이 우리를 도와줬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을 거다."

―그런 단순 지원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 참혹한 현실을 한국에 알리기로 했다. '통일강냉이'라는 이름으로 국내 언론에 현장 상황을 전달했다. 이게 보도되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북한에 쌀 보내기 운동도 시작됐다."

북한과 탈북자들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졌지만 이 과정에서 탈북자들 신원이 공개되는 바람에 중국에 더 이상 체류하기 어렵게 됐다. 결국 그 탈북자들을 중국에서 데리고 나오기로 결심했다. 그게 바로 1997년 탈북자 13명을 한국으로 보내기 위한 대장정을 시작한 계기였다.

"재밌는 건 외국인 노동자 돕는 일을 할 땐 우리를 보고 좌파라고 하더니, 탈북자 돕는 일을 하니깐 보수 우익이라 하더라. 우린 달라진 게 없고 돕는 대상만 바뀌었을 뿐인데 말이다."

◇2012년 강제 북송 반대… 차인표는 형부

 
 
2012년 국내 언론에 여명학교 학생들이 등장했다. 당시 중국 정부가 탈북자 수십명을 북송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집회가 연일 열린 것이다. 여명학교 학생들은 마스크를 쓰고 나타났다.

―그때 학생들은 왜 거리로 뛰어나왔나.

"북송 위기에 처한 탈북자 중에 우리 학생들의 지인이 있었다. 우리 애들이 제일 걱정한 건 그들이 북송 도중 자살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제발 포기하지 말고 살아만 달라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자신들도 그런 과정을 거쳐 탈북했으니까."

그는 탤런트 차인표씨를 '형부'라고 불렀다. 영화 '크로싱' 시사회에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됐다. 이후 가족끼리 왕래할 정도로 친해졌다. 그는 차인표·신애라 부부에 대해 "사람을 위로할 줄 아는 분들"이라고 했다.

―차인표씨가 북송 반대 집회에도 참석했다.

"한 학생이 새벽에 전화를 걸어 '우릴 돕는다면서 왜 가만히 있느냐'고 울부짖었다. 학교에 미칠 파장을 우려해 조심했던 건데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집회에 나가기 전 차인표씨에게 '형부, 아무래도 애들을 보호하려면 내가 나서야 할 것 같아요.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랬더니 전화가 왔다. 혼자 어떻게 나가느냐고 함께 가자고…. 동료 연예인 수십명도 함께 왔다. 형부는 그 이후 비자가 안 나와 중국에 가지 못했다."

그는 한 가지 꿈이 있다고 했다. 언젠가 남북한 아이들 모두 행복하게 해주는 학교를 만드는 꿈이다.

"부모 마음은 다 똑같다. 애들이 행복한 것. 그건 이념적인 학교는 아닐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다. 인내력 하나만은 끝내주니깐."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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