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자유아시아방송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위성사진으로 본 회령 전거리 교화소 모습.사진-구글어스 캡쳐
위성사진으로 본 회령 전거리 교화소 모습.사진-구글어스 캡쳐
남한에 간 탈북자들 중 상당수가 강제북송의 경험이 있고 또 이들 중 많은 수가 전거리 교화소에 수감된 경험을 고백합니다. 오늘은 탈북여성 한청미(가명) 씨가 말하는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과거 교화소 생활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한청미: 우리가 교화소 입소할 때 공민증도 다 국가에다 반납하고 들어가거든요. 보안원들 말이 너희는 인구수에도 등록 안 된 사람들이다. 너희는 사람이 아니다.

현재 남한에 사는 40대 초반의 탈북여성 한청미(가명) 씨는 2011년까지 함경북도 회령시 전거리 노동교화소에 있었습니다. 한 씨의 죄는 탈북. 전기 사정이 안 좋은 북한이지만 교화소에선 밤에도 감방 안에는 전깃불을 끄지 않습니다. 많은 것이 턱없이 부족한 곳인데 교화소에선 소금이 금보다 더 귀합니다. 그런데 많아도 너무 많은 것이 있답니다.

한청미: 교화소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빈대예요. 빈대가 엄청 많아요. 사람이 먹지 못하는데 빈대에게 피를 뜯기다 나면 몇 시간 자기나 했는지 그러니까 겨울을 제일 그리워하죠. 추우면 빈대가 덜해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겨울을 제일 좋아하거든요. 빈대한테 뜯기지 않으니까, 밖에서 일할 때는 정말 추워요. 전거리 교화소의 맛을 알려면 겨울을 지나봐야 전거리 교화소의 혹독함을 안다 이런 정도거든요. 지대가 높아서 겨울엔 정말 추워요. 그래도 모두 겨울을 좋아해요. 그 빈대의 성화를 안 받아서요. 교화소에서 방역을 해주는데도 그 약들이 정말 말을 안 듣더라고요.

빈대에게 뜯겨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집요함이란 상상을 초월합니다. 북한에도 널려 알려진 남한의 자본가 고 정주영 회장의 빈대에 얽힌 '빈대보다 못한 놈‘이란 이야기는 유명한데요.  정 회장이 젊은 시절 막노동을 했는데 하도 빈대에게 뜯기다 보니 침대 다리에다 네 곳에 물을 담은 세숫대야를 놓고 잤다고 합니다. 빈대는 물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빈대에게 물어 뜯겨 가만히 살펴보니 침상 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없으니 빈대가 벽을 타고 천정으로 가서는 사람 몸으로 수직낙하 하더라는 겁니다. 그런 경험을 한 정 회장은 훗날 부하직원을 나무랄 때 빈대보다 못한 놈이라고 꾸짖었다는 겁니다.

사람보다 빈대가 한 수 위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빈대는 그렇잖아도 잠이 부족한 교화소 생활을 어렵게 하는 불청객임엔 틀림없어 보입니다.

한청미: 밤에 빈대를 못 올라오게 한다고 비닐을 깔고 자거든요. 사실 습기도 빠지지 않고 사람 몸에 얼마나 나빠요. 그런데 비닐을 깔고 이불 테두리에 비닐을 감고 빈대가 비닐에 달라붙지 못한다고 베개까지 다 비닐로 감싸요. 더우니까 자면서 땀 흘리며 자고 일어나면 물이 고일 정도로 땀이 고이고 습기가 차는데 그대도 어떻게 올라오는지 빈대가 뜯어요. 아침에 일어나게 되면 사람피를 너무 먹어서 똥똥해서 건드려도 일어나질 못해요. 그러면 사람들이 아침에 사방에서 빈대 죽이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몰라요.

가뜩이나 먹을 것이 부족해 영양이 안 좋은 수감자들. 살이 쭉쭉 빠져서 뼈만 남았는데 앙상한 몸에 달라붙어 매일 밤 피를 빠는 빈대. 뚱뚱한 사람의 피보다 마른 사람의 피가 더 끌리는 것인지는 몰라도 넘쳐나는 빈대가 고통인 것처럼 배가 등가죽에 붙어버리는 것도 고통입니다.

한청미: 교화소 생활하면 제일 큰 어려움이 배고픔이었어요. 그리고 가족이 그립고, 자유가  없는 것. 우리는 교화소에서 웃지도 못하거든요. 큰소리로 말도 못하고 노래도 못 부르고요. 거의 다 젊은 아이들인데 노래 흥 했다가는 다음 날로 교화소 보안과 가서 비판서를 쓰고 독방가고 그래야 해요. 노래를 못 부르고 자유가 없잖아요. 일단 일 끝나면 감방 안에 갇혀서 문을 덜컹 닫으면 그 안에서 똥냄새를 맡으며 거기서 생활해야 하니까 감방 안에 갇히는 순간 내 인생이 막혔구나. 이런 생각이 들죠.

교화소에서도 수감자 얼굴에 생기가 돌 때가 있습니다. 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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