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해범 조선일보 동북아시아연구소장
지해범 조선일보 동북아시아연구소장

조르주 비고란 프랑스 화가가 그린 '낚시질'이란 그림이 있다. 프랑스 명문 미술학교를 나와 일본에서 만화 잡지를 발행하던 그는 1894년 청일전쟁 발발 후 한반도로 건너와 열강의 먹잇감이 돼가는 조선의 비참한 신세를 풍자하는 그림을 그렸다. '낚시질'은 일본인과 중국인이 연못 속의 물고기 '꼬레(COREE)'를 낚기 위해 낚싯대를 드리우고 콧수염을 단 러시아인이 이를 지켜보는 장면이다. 100년도 더 된 그림이 다시 떠오른 것은 최근 한반도 주변 상황이 그때와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주변 강대국 중 노골적으로 낚싯대를 던지는 나라는 일본이다. 아베 총리는 '집단 자위권'이란 개념을 들고나와 한반도 유사시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도 무력 개입할 가능성을 열어놓으려 한다. 6·25전쟁 같은 급변 상황에서 미·중이 한반도 운명을 결정하게 놔두지 않고 자국 이익을 관철하겠다는 뜻이다. 아베 정부는 최근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해 한·중을 견제하는 외교 카드를 빼들었다.

북한은 그동안 일본이 재무장의 명분으로 삼던 '군사 위협국'이다. 북핵 위협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아베는 '스톡홀름 합의'를 통해 북한이 '일본인 납치자 재조사'를 시작하기만 해도 독자적 대북 제재를 풀겠다고 약속했다. 조총련의 대북 송금과 기업 간 무역 거래, 북한 선박의 일본 입항이 가능해진다. 장차 두 나라가 수교하면 수백억 달러의 식민시대 보상금이 흘러가 북의 핵무력은 더욱 강화된다. 아베의 모순적인 외교 카드는 중국의 한반도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한국 주도의 남북통일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고 봐야 한다.

중국의 한반도 개입 의지도 못지않다.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지난달 말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가진 회담에서 "가까운 친척집을 찾아 친구와 아름다운 청사진을 같이 그리고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그의 발언은 점잖고 달콤하지만 '친척집'이란 단어는 국가관계에선 함부로 쓸 수 없는 말이다. 조공(朝貢) 체제하의 '형님·동생' 관계를 암시하며, 봉건시대 질서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도 드러난다. 주한 중국 대사는 기자회견에서 "한·미 연합 군사훈련이 북한을 자극하므로 한국은 미국을 설득해 군사훈련을 자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도 최근 서해에서 러시아와 합동 군사훈련을 벌였다. 그런 중국이 북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한국의 자위적 훈련에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하고 있다. 지난달 한국 해경이 세월호 사건에 총동원된 틈을 타 중국 어선 수백 척이 우리 해역에서 불법 조업을 했다. '불난 틈에 도적질한' 격이다. 중국이 한국을 진짜 '친구'로 여긴다면 이렇게 하진 않을 것이다.

인체 면역력이 떨어질 때 세균이 침입하듯 외세의 간섭은 국가의 자위력과 결집력이 약화될 때 찾아온다. 세월호 침몰 이후 대통령 리더십이 흔들리고 국론이 분열되자 주변국들은 더욱 뻔뻔해지고 있다. 노무현·이명박 정부도 주변 강대국에 무시당하며 '등신 외교'란 소리를 들었다. 공통의 원인은 탄핵 사태와 촛불 시위로 '식물 정부'가 되면서 강력한 대응력을 상실한 데 있다. 주변국은 늘 그 틈을 노린다.

조르주 비고가 다시 살아온다면 '낚시질' 그림은 어떻게 바뀔까. 그림을 바꾸는 주체는 비고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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