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2월 김일성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5기8차 전원회의 무대는 엄숙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회의 개막 사흘째이자 마지막 날인 13일 당초 의제에 없던 김정일 후계문제가 공론으로 제기된 것이다.

회의에서 이 문제를 처음 꺼낸 것은 제1부주석 김일이었다.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동료이자 혁명1세대 원로인 김일이 김정일을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현 정치국) 위원으로 추대할 것을 제의한 것이다.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는 노동당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30대 초반의 김정일을 위원으로 추대하자는 것은 그를 김일성의 후계자로 결정하자는 뜻이었다.

회의 참석자들이 일제히 박수로써 즉각 찬성의 뜻을 표시했지만 김일성은 선뜻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김일성은 "비서(김정일)는 아직 나이도 젊으니 그 문제는 일단 보류하는 것이 좋겠다"며 유보의 뜻을 내비쳤다.

이에 원로인 임춘추와 오진우 등이 잇달아 일어나 후계문제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김정일의 후계자 지명을 거듭 촉구하고 나섰다. 그제서야 김일성은 "모든 위원들의 의견이 정 그렇다면 거기에 좇을 수밖에 없겠다"며 김정일의 후계지명을 수용했다. 이에 따라 당중앙위원회는 김정일을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추대하고 그를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한다는 '결정'을 채택했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지명된 것은 74년 2월이지만 그를 후계자로 올려놓기 위한 작업은 70년대 초반부터 구체화되고 있었다. 72년 10월에는 그를 후계자로 추대할 것을 청원하는 편지가 중앙당에 쇄도하고 있었다. 이 즈음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5기5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은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피선되며 이듬해 9월에는 당중앙위원회의 양대 핵심요직인 조직·선전 담당 비서에 보임된다.

당내부에서는 김정일을 당중앙위원회 비서로 선출한 제5기7차 전원회의 결정서와 그 의미를 설명한 '붉은 편지'가 은밀히 회람되고 있었으며, 당세포마다 이 문제를 토의하고 김정일을 후계자로 추대하며 받들 것을 맹세하는 결의서와 개개인의 맹세문을 작성해 중앙당에 올리도록 조치했다. 누구도 감히 김정일의 후계지명에 반기를 들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중앙당에 쇄도했다는 청원편지나 당세포별 결의서와 당원 개개인의 맹세문, 그리고 후계지명 석상에서 보인 원로들의 '간곡한 요청'과 김일성의 '유보'의사는 '인민적 추대'를 연출하기 위한 준비된 작업이었다.

전원회의가 끝난 후 열린 정치위원회 상무위원회에서 김일성은 "오늘 전원회의가 매우 중요한 문제를 토의했다"면서 "전원회의 참가자들이 한결같이 김정일 비서를 주체위업 완성을 위해 우리 당 수뇌부에 추대한다고 하였는데 나의 생각과 같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처음부터 김정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면서도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짐짓 마음에 없는 행동을 했던 것이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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