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운보) 김기창(김기창)선생의 ‘바보미술’ 전시회장을 조용히 둘러보면서 나는 거의 슬픔에 가까운 감동에 젖어들었다. 1930년대의 데뷔 시절부터 70년대까지 그림들은 조선일보사 미술관(02-724-6328)에서, 그 이후 현재까지의 그림들은 서울 사간동 소재 ‘갤러리 현대’(02-734-6111)에서 동시에 전시되고 있는데(8월 15일까지) 그 규모와 다양성만 가지고도 깊은 감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수많은 개인들이 아끼고 아끼며 소장하고 있는 그림들이, 88세의 운보선생이 평생동안 그려온 그림의 대표작들이 빠짐없이 다 모여있다는 사실에서 느껴지는 감동이 깊었다. 관람인을 위한 전시회가 아니라 병원의 중환자실에 누워 어쩌면 세상 뜨실 날이 멀지 않은 화백(화백)을 위안하기 위하여 소장인들이 각기 자기 소유의 그림을 들고 나와 서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특히 1934년에 그린 운보선생의 데뷔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정청(정청)’ 앞에서는 처연한 느낌이 더했다. 일본화풍(일본화풍)의 그림에서 식민지 시대 한국화가의 모습이 무성영화의 쓸쓸한 장면처럼 마음 밑바닥에 젖어드는 것이었다. 그림 속의 모델인 처녀와 소녀의 이야기도 가슴 아프다. 처녀는 운보선생의 첫사랑이었다. 그러나 운보선생 할머니의 반대로 인연이 맺어지지 못하고 결국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소녀는 운보선생의 여동생으로 지금은 남동생과 함께 북한에 살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볼 수 없는 곳에 떠나 보내고 그 슬픔을 평생 가슴에 묻고 그림을 그려온 운보선생의 그림에서 광기(광기) 같은 힘이 느껴지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내가 운보선생의 그림을 처음 대한 것은 50년대 국민학생 시절 신문 연재 역사소설이나 잡지의 삽화들에서였다. 그 거칠다고 할 만큼 자유분방하고 힘찬 그림들은 소설 내용과 관계없이 한 폭의 그림으로 감상되어지는 것이었다. 그 때는 6·25 전쟁 이후 살림이 어렵던 시절이어선지 잡지 표지화라든가 잡지 삽화를 그리는 본격화가가 많았다. 오늘날처럼 대중문화 삽화가와 본격화가의 차이가 뚜렷이 구별되지 않아서 그 덕택에 우리 세대는 유명화가들의 그림을 아주 친숙하게 보며 자랐다. 그런 문화적 영향이 나와 우리 세대를 만들었고 그런 뜻에서 운보선생 역시 작가로서 나를 만들어준 내 일생의 중요한 한 문화인 것이다.

운보선생의 종합전시회를 보고 있으려니 내 생애에 이런 전시회를 두 번 다시 볼 수 있을 것인가, 운보선생과 함께, 그리고 나의 문화를 만들어준 많은 예술인들과 함께 나도 떠나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도 드는 것이었다.

그렇다. 토막토막 끊어지며 이질적으로 변화해온 지난 80여년의 한국 역사를, 다양하게 변화해온 한국의 영혼을 고스란히 그림으로 형상화한 것이 운보의 그림이었구나! 그토록 미친 듯이 이런 구성, 저런 조형, 이런 색채, 저런 소재로 우리를 혼란시켜온 운보선생의 그림들이 이제 수십년의 역사와 함께 보니 그대로 우리 민족의 내면적 삶 자체였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운보의 ‘바보미술’을 가지게된 우리 민족은 참으로 행복하다. 장사 같은 운보선생은 위대한 민족문화의 벽돌 한 장을 쌓아올린 것이다!

/김승옥·소설가·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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