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 지배체제와 정치적 후견인은 가장 위태로운 관계이기에
장성택 숙청은 必然이지만… '젊은' 독재자가 2인자를 없앤 건
자신의 발밑을 무너뜨린 셈… 북한發 한반도 급변 사태 대비해야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장성택이 전격 처형된 지 일주일째다. 숙청의 피바람이 얼어붙은 북녘 땅을 휩쓸고 있다. 공포정치의 악령(惡靈)에 사로잡힌 북한 인민의 소리 없는 절규(絶叫)만이 허공을 찌른다.북한의 2인자 장성택은 '혁명의 이름과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되었다. 아름다운 수사(修辭)와 달리 공산주의 인민혁명은 폭압적 절대 권력을 낳고 민중에 대한 무한 폭력을 정당화한다. 해방과 정의를 앞세운 혁명의 논리는 굶주린 아귀(餓鬼)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적대 세력이 사라진 자리에 보통 사람들이 희생양이 된다. 반동분자와 방관자가 일소된 뒤에도 혁명과 인민의 이름을 빙자한 공포정치는 멈출 줄 모른다.

숨어 있는 적에게서 혁명을 지킨다며 감시와 폭력이 제도화된다. 테러의 일상화는 공포의 내면화를 부른다.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뼛속까지 이중적인 행동 양식을 익힌다. 책임을 지거나 앞장서는 행위는 위태로운 것으로 각인된다. 철저히 수동적인 사회주의적 인민은 그렇게 태어났다. 북한에서 1995~1998년의 대기근 때 수십만 명에서 수백만 명에 이르는 북한 인민이 '가만히 앉은 채 굶어 죽어간 것'은 이 때문이다. 사회적 창조성과 생산성의 사멸(死滅)은 당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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