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조선일보 객원기자


2003년 유엔인권위원회에 처음 상정된 북한인권결의안에 한국 정부(노무현 정권)가 불참하자 탈북자들은 형언할 수 없는 비통함과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같은 민족의 인권을 대놓고 불참·기권하는 뻔뻔함이 나올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후 우리 정부는 3년 연속 북한인권결의안에 불참·기권했다. 김정일 정권은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기특한 노무현 정권에 흐믓했겠지만, 노예 상태에 직면한 다수의 북한 인민은 남한 정권의 이런 행동에 절망감을 느꼈다.

1980년대 중반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이 벌어질 때 북한 TV는 한동안 대학생들의 극렬 데모를 보여주었다. 그때 북한 청년들의 관심사는 한국 대학생들이 입고 있는 옷과 신발이었다. 또 정권을 반대해 저렇게 싸울 수 있는 자유가 부러웠다. 북한 정권은 남한 대학생들의 데모 장면이 오히려 역작용을 부른다는 판단하에 방영을 중단했다. 1989년 임수경이 평양에 왔을 때 우리가 그를 환영한 것은 꾸미지 않은 자유로움 때문이었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자유분방한 모습에 많은 젊은이가 남한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됐다.

남한을 동경한 북한의 젊은 세대는 수령 독재를 반대하는 반체제 성향의 학생들이었다. 또 북한 체제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다수의 엘리트도 어떻게 하면 김씨 왕조에서 북한 인민을 구원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김씨 정권이 스스로 변한다든지 누가 도와서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북한 엘리트는 거의 없다. 오직 남한 진보 세력만 그렇게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1997년 2월 황장엽 전 노동당비서가 망명하면서 북한 정권은 붕괴 직전에 내몰렸다. 북한 내 반체제 인사들은 수백만이 아사(餓死)한 분노가 드디어 북한 정권을 무너지게 하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김정일 정권을 살려주었고, 노무현 정권은 한 술 더 떠 국제사회의 북한 인권 공세를 막아주었다. 한국 진보좌파는 햇볕정책이 북한 정권을 살려주었다고 믿고 싶지 않겠지만, 북한 엘리트들의 생각은 다르다. 한국 좌파는 사회주의 이념과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종북 세력과 결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북한 반체제 인사들과 이념을 함께할 수 없다. 오히려 북한 정권과 코드가 맞는다. 이런 사실을 북한 엘리트들도 알아챘다. 다수의 북한 인민이 김씨 왕조에 등을 돌릴수록 그 불똥은 한국 좌파에 미칠 것이다.

일본의 고이즈미 전 총리나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김정일을 만난 것은 납치된 자국민의 인권을 위해서였다. 그들은 김정일을 만나서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고이즈미는 아예 도시락을 준비해서 갔다고 한다. 반대로 우리의 대통령들이 김정일을 만나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북한 인민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한국 진보가 지금까지 북한과 협력한 행태는 북한의 민주화와 거리가 먼 정권과의 협력이었다. 계속해서 북한 주민의 자유와 인권을 위한 투쟁을 돕지 않고 북한 정권의 입장만 대변하려 든다면, 통일 후 북한 인민들의 분노를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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