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한 북한의 ‘조건부 미사일 개발 포기’ 정보가 G8(주요 8개국) 정상회의에서도 돌출변수로 부각되면서 파장이 확대되고 있다. 푸틴 대통령에 따르면 지난 19일 북한 방문 때 김정일(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외국이 위성 발사를 지원해준다면 미사일 개발계획을 단념할 수 있다”는 뜻의 발언을 했다.

푸틴 대통령은 21일 오키나와에 도착하자마자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이 얘기를 꺼냈고, 이어 열린 G8 정상의 만찬회의에서도 같은 얘기를 되풀이했다. 푸틴의 전언은 미국 측을 갑자기 바쁘게 만들었다. 클린턴을 수행한 샌디 버거 국가안보담당보좌관은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긴급회담을 갖고 김정일 위원장의 ‘돌출 제안’의 진의 탐색에 나섰다. 분(분) 단위로 스케줄이 짜여진 정상회의에서 예정에 없는 회담을 만든 것 자체가 미국의 관심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일본언론은 해설했다.

클린턴의 반응은 22일 오전 모리(삼희랑) 일본 총리와의 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나왔다. 그는 “푸틴 대통령의 말을 근거로 한다면 (김정일 위원장의) 제안은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일단 중요한 제안으로 ‘접수’해 검토해 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클린턴은 “우선 상세한 내용을 알아야 한다. 정확히 어떤 제안이고 (북한이 대가로) 무엇을 요구하는지가 확실치 않은 이상 최종 판단은 불가능하다”면서 우선 진의 확인이 급선무임을 강조했다.

만일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이 진심이라면 북한의 핵·미사일 억지에 중점을 두어온 미국의 대북한 정책은 근본적 수정이 불가피해진다. 나아가 북한의 위협을 이유 중 하나로 내걸고 있는 NMD (국가미사일방위구상) 계획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국은 푸틴의 전언과 북한의 동기에 애매한 점이 많다며 의심을 풀지 않고 있다. 이달 중순 미·북 미사일 협의 때만 해도 미사일 자주권을 내세우며 미국에 연간 10억달러의 개발포기 대가를 요구했던 북한 측이 왜 갑자기 이같은 요구들을 포기했는지가 우선 의문점이라고 미국 측은 지적했다.

스타인버그 대통령 보좌관은 “북한이 타국의 위성 발사사업을 이용하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로켓 발사체를 달라는 것인가”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만일 후자라면 북한의 미사일 기술 개선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는 만큼 미국으로선 응하기 힘들다.

미·일 정부 관계자들은 이번 김정일 위원장의 제안이 93~94년 핵개발 사태 때와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당시 북한이 평화 목적의 원자력 개발임을 내세워 국제지원을 얻어냈던 것처럼 이번에도 국제지원을 대가로 한 미사일 개발 포기의 수순을 밟기 시작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이 때문에 미국 정부 안에서는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방식을 재활용, 국제 컨소시엄을 조직해 미사일 포기를 전제로 북한에 지원해주는 구상도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경=박정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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