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우

연두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해인 금년에 역점을 두고 추진해 나갈 일 네 가지를 꼽으면서 남북관계 개선도 그 하나로 포함시켰다. 그리고 남북관계 개선에 대해서는 경의선 연결, 개성공단 진척, 금강산 육상관광로 개척, 이산가족의 만남과 군사적 신뢰구축을 5대 과제로 천명하였다. 임기 초기 ‘햇볕정책’의 기치 아래 과감한 통일정책을 국정목표로 내세우던 열기는 사라지고 북한에서 어떻게 대응할지 모를 프로젝트만 나열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햇볕정책의 기본틀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앞선 정권에서 제시했던 「민족화합민주통일론」과 「한민족공동체통일론」의 골간인 3단계 통일론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라 했다. 과연 햇볕정책의 3단계 통일론과 앞선 정권의 3단계 통일론은 같은가? 외형은 비슷하나(似) 기본정신과 실천방안은 다르다(非).

3단계통일론의 첫 단계는 남북한 공존체제의 제도화이다. 남북한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전쟁상태를 종결하고 평화를 보장하는 제도를 창출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이러한 토대위에서 남북한 간의 교류협력을 증진시켜 나가면서 남북한 간의 체제상응성을 높여 사실상의 통일을 이루어 나가는 단계이고, 세 번째 단계는 남북한 간의 정치통합을 이루는 단계다.

이 3단계 통일론에서 제일 중요한 점은 앞 단계가 뒤에 오는 단계의 전제조건이 된다는 점이다. 즉 첫 단계가 이루어진 다음에 제2단계인 교류협력이 추진되어야 하며 정치통합은 제2단계가 목적하는 실질적 사회통합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비로소 논의될 수 있다는 구상이다.

햇볕정책도 시작할 때는 이러한 틀을 존중하여 남북한 관계의 공존합의 도출에 역점을 두었었다. 6·15정상회담까지 그랬었다. 그러나 첫 단계는 북한의 거부로 한 발자국도 진척되지 못했다. 이에 실망한 현 정부는 제2단계인 교류협력증대에 역점을 두고 대북접촉을 시도했다. 대북지원으로 북한을 회유하여 제1단계인 공존의 제도화를 도출하려는 생각에서였다(先供後得). 나아가서 정부는 제3단계의 정치통합 논의까지 함께 추진하려 했다. ‘느슨한 연방제’ 수용이 그것이다. 이렇게 단계를 초월한 마구잡이식 대북접근이 국민들의 대북관에 혼란을 일으켰고 정부 의도에 대한 국민들의 의구심을 증폭시켰음은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정부의 흐트러진 대북정책은 한·미관계에도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 부시정부는 반년간의 검토기간을 마치고 작년 6월 6일 대북한 정책기조를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대량살상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의 개발 및 수출금지와 한국을 위협하는 재래식 군사력에 의한 위협제거를 당면과제로 삼고 북한과의 회담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북한의 호응을 유도하기 위한 어떠한 보상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미국은 정확히 한국의 전통적 3단계 통일론을 따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셈이다. 즉 1단계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제2단계의 지원과 교류를 시작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셈이다.
곧 있을 한·미 정상회담에서 표출될지 모르는 한·미 간의 이러한 정책시각의 차이는 양국간의 긴장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긴장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대북정책에서 가장 크게 힘을 발휘할 ‘긴밀한 한·미공조’가 흔들리게 되면 결국 북한의 입지만 강화시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미 「신년사설」을 통하여 대남정책이 변하지 않았음을 밝혔다. 자주, 민족대단결, 남북관계개선, 외세반통일세력반대 및 접촉과 대화를 통한 남북인민간의 연대강화 등을 5대방침으로 내세웠다. 남북공존이 아니라 한국사회 내의 북한동조세력과의 연대를 높이는 데 노력을 집중하겠다는 뜻으로 ‘제1단계를 넘어선 북한식 2단계 진입’을 선언한 셈이다. 이에 따라 금년에는 많은 ‘민간접촉’이 이루어질 것이고 한국 내의 혼란은 가중될 것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잘못된 길’임을 깨달았으면 더 이상 헤매지 말고 바른길로 되돌아가야 한다. 혼란수습이 임기 마지막해에 해야 할 최대과제라 생각한다.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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