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개혁은 광복 후 북한지역의 첫 중앙정권기구로 등장한(1946년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민주개혁」이라는 이름아래 단행한 일련의 공산화개혁 조치의 첫 과업으로 시행됐다.

당시 북한지역 전체 인구의 4분의 3이 농민이었고, 농가 호수의 4%가 지주였는데 이들이 총경지면적의 58.2%를 점유하고 있었다. 농가호수의 56.7%가 빈농이었으나 이들이 가진 경지는 전체의 5.4%에 불과했다. 주요 산업국유화와 남녀평등권법령·노동법령 채택 등 여타 조치에 앞서 서둘러 토지개혁에 착수한 배경을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임시인민위는 1946년 3월 「북조선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을 공포, 본격적인 토지개혁에 들어갔다. 이어 토지개혁의 전위대인 농촌위원회와, 농촌위원회의 활동을 측면에서 지원할 토지개혁지원대를 구성했으며, 토지를 무상 몰수하여 무상 분배하는 구체적 실행단계의 수순을 밟아나갔다.

농촌위원회는 토지개혁의 최대 수혜자가 될 빈농과 고농(雇農) 출신으로 조직했으며 전국적으로 약 1만1500여 개, 여기에 망라된 인원은 9만여 명에 달했다. 토지개혁지원대는 주로 노동자들로 구성됐는데 토지개혁의 필요성과 의의를 홍보하고, 유사시에는 보안기관·지역 자위대와 협력해 토지개혁 반대 또는 저항세력을 타도·분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북한은 토지개혁에 착수하면서 5정보 이상의 토지소유자를 지주로 규정해 이들의 땅과 재산, 기타 일제 소유토지와 친일파·민족반역자·종교단체의 토지를 무상 몰수했다. 이에 따라 전체적으로 100만여 정보가 몰수됐는데 이 가운데 98만여 정보를 빈농 44만 호를 포함한 총 72만4500여 농가에 무상 분배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다른 공산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20여 일 안에 마무리됐고, 철저히 수행됐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시행과정에서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서 토지를 잃게 된 세력들의 저항과 반발이 만만찮았고, 개혁 주체세력들의 불찰과 미숙함이 빚은 오류와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다. 특히 함흥에서는 토지개혁을 반대하는 전문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의 조직적인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어떤 지방에서는 5정보 이하의 땅을 가진 자를 지주로 규정해 마찰을 낳았고, 친일파를 규정하는데 원칙 없이 마구잡이로 하여 불필요한 말썽과 혼란을 불렀다. 사적 복수심에 사로잡혀 규정을 위반 한 사례가 곳곳에서 노출됐는가 하면 일부 농민들은 지주의 토지를 자기 토지라고 속이면서까지 지주를 옹호하는 일도 있었다.

토지개혁이 이루어짐으로써 전반적으로 토지소유의 불균등이 상당부분 해소되었으며, 취약했던 공산정권의 지지기반도 공고해졌다. 북한이 토지개혁을 통해 무상 분배한 것은 토지의 소유권이 아니라 경작권이었다. 북한은 1954년 4월부터 58년 8월까지 농업협동화를 추진해 모든 토지를 협동화(사회적 소유) 또는 국유화(전인민적 소유)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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