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섭
/국방대학교 교수

9·11 테러를 일으킨 알 카에다가 화생무기를 대규모로 개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게 하는 흔적들이 발견돼 세계를 전율케 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테러조직과 국제적인 대량살상무기의 거래 커넥션에 주목하고 이라크와 북한 등 ‘불량국가’로 지목한 국가들에 대량살상무기의 폐기와 사찰을 촉구하고 나섰다.

화생무기는 가난한 자들의 핵무기라고 불린다. 1차대전 때 발생한 전염병인 천연두로 죽은 서양인이 전쟁으로 죽은 인구보다 많았으니 세균이 전쟁수단으로 쓰인다면 그 악영향은 천문학적일 것이다. 그러니 테러분자를 포함한 기존의 세계질서를 깨뜨리려는 세력들에겐 신경성, 수포성 등 화학 작용제와 탄저균, 천연두, 유행성출혈열 등 세균과 바이러스를 만들어 확산시키고자 하는 유혹이 없을 수 없다.

북한의 화생무기 보유와 사용 가능성은 생각보다 훨씬 위협적이다. 국방부가 매년 발간하는 「국방백서」는 북한이 2500~5000t의 화학 작용제를 보유하고 있으며, 각종 화학탄 발사 수단을 갖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북한군은 연대급까지 화학소대를 편성, 화생방 작전능력을 갖추고 실전에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탄저균을 포함한 생물무기도 배양하고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90년대 핵무기 개발 시도에 이어 북한의 화생전 능력 보유는 우리에겐 ‘현존하는’ 안보위협이다. 재래식 군사력 면에서 한·미연합 전력에 뒤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북한은 상대적으로 적은 돈이 드는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해 비(非)대칭 위협으로 군사적 승리를 거두겠다는 전략의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장거리 미사일 개발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핵무기 개발이 용이하지 않은 상태에서 화생무기로 탄두를 만들어 미국과 일본을 위협한다면, 유사시 미군의 증원을 억제하는 효과를 발휘할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다. 더욱이 개전 초기에 이를 사용한다면 한·미연합군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다. 하지만 화생무기가 민간인을 상대로 무차별적으로 사용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행히도 우리 군에서는 1995년부터 한·미연합사 주관으로 북한의 화생무기 위협을 본격적으로 평가하고 대비해왔다. 또 한·미연합사 주관 하에 코랄 브리즈라는 훈련을 실시했고, 이것이 계기가 돼 우리 군에 화생방 방호사령부를 설치하게 됐다.

그러나 북한이 전쟁시에 화생무기를 사용하면 군사작전 차원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훈련하는 것은 소극적인 방법이다. 북한이 화생무기를 개발하고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보다 근본적이고 적극적인 대응방법이다. 이는 북한이 화학무기 금지협약(CWC)에 가입, 화학무기 개발·생산·비축 시설을 자발적으로 공개하고 폐기하며, 국제적인 사찰을 받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걸프전 당시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화학무기 사용시 반드시 보복을 당할 것이란 위협 의사를 전달했는데, 이러한 정책 의지를 평소에 보이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이 시대상황과 미국의 정책을 제대로 파악하고, 협조적인 태도로 나오는 일이다. 세계를 경악케 한 9·11 테러에 대해 우리 군이 경계태세를 강화하자 북한은 시비를 걸 뿐 아니라, 이를 핑계로 남북 대화도 기피하고 있다.

북한은 우리의 안보태세를 간섭하는 대신에 평화를 위한 진정한 노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교착상태에 빠진 북·미관계와 남북한 관계를 발전시키는 첩경이다. 차제에 북한은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화생무기를 폐기하는 「자주적」 결단을 내리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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