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핵 문제를 담당하는 외무성이 26일 ‘대화 전제조건이나 대화 순서를 정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이는 남북 대화와 6자회담을 하려면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먼저 보이라고 요구한 우리 정부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 보인 것”(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이란 분석이다.

정부는 지난 10일 북한에 “남북 대화를 하려면 천안함·연평도 도발에 대한 책임 있는 조치와 함께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 확인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은 지금까지 천안함·연평도 문제를 논의할 군사회담에만 응했을 뿐 비핵화 문제에 대해선 침묵으로 일관했었다.

이날 북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는 우리의 비핵화 논의 요구에 대한 답변 성격을 띠고 있다. 외무성은 “조선반도 핵 문제는 철두철미 우리에 대한 미국의 핵전쟁 위협과 적대시 정책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문제”라는 입장을 밝혔다. “북핵 문제는 미·북이나 최소한 6자회담에서 얘기할 주제이지 남북이 다룰 의제는 아니라는 의미”(외교 소식통)라는 것이다. 특히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는 6자회담에서도 아직 다루지 않은 주제인데 남북대화의 전제처럼 우리 정부가 거론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취지로 분석된다.

또 “전 조선반도를 비핵화하려는 우리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평등의 정신과 동시행동 원칙에 따라 9.19 공동성명을 전면적으로 이행해 나갈 우리의 의지에도 변함이 없다”며 기존의 입장을 반복했다.

예전 같으면 ‘남조선 주장은 우스운 얘기’라고 무시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미·중 정상이 남북대화를 강조하는 상황에서 대놓고 우리측 제안을 거부하기 어렵기 때문에 에둘러 의사를 표시했을 수도 있다. 특히 외무성은 “(핵 문제의) 근원을 제거할 수 있는 대화 방식이 필수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안보부서 당국자는 “6자회담이 재개되면 북한이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할 것임을 시사한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이번 담화에서 명시적으로 남측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은 것은 미묘한 여지를 남긴다. 6자회담으로 가려면 남북 간 비핵화 회담 관문을 거쳐야 한다는 미·중의 압력까지 고려할 때 북한이 모호성을 유지한 채 ‘비핵화 회담’을 교묘하게 활용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안용현 기자 ahny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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