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호
/조선일보 통한문제연구소장 hhkim@chosun.com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쯤에서 결별의 과정을 밟기로 작정한 것일까.

작년 남북정상회담 후 김정일에 대해 “대화상대로서 큰 신뢰감이 생겼다”고 평가했던 김 대통령은 이제 그에 대한 실망감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그의 서울 답방에 대해 “약속했으니 오리라 믿는다”고 하던 확신이 “단언해서 말할 수 없다”라는 회의로 바뀌었고, 북한의 최근 대남 자세에 대해서도 “실망했다”고 직접적인 표현을 썼다. “대북정책은 임기 내에 내가 다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다”고 말한 데서는 그동안의 불굴의 의지는 스러지고 한계를 절감하는 모습이다.

북한은 어떤가. 방송들은 김 대통령의 북한 개혁·개방 관련 언급을 놓고 “용납못할 엄중한 도전”이라고 비난의 포문을 다시 열었다. 장관급 회담 결렬에 대해 격렬한 용어로 우리 측을 비난하는가 하면, 비무장지대 총격사건으로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 내부적으로도 전금진 등 대화일꾼들을 숙청함으로써 그간의 남북대화에 대해 부정적 결산을 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남북관계가 이런 모양새를 띠는 데에는 김 대통령의 레임덕 현상, 한국의 대북지원 능력과 의지의 쇠잔, 9·11 테러사태 이후의 국제환경 변화, 북한 군부의 반발 등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남북 대화를 ‘자기 방식’의 통일과정으로 이어가려는 북한이 주한미군 문제 등 정치·군사적 핵심사안을 김대중 정부와 함께 다루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이 9·11 테러에 따른 한국의 비상태세를 대화 중단의 명분으로 내건 것도 “미국이냐, 민족이냐”를 선택하라는 강요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남북대화의 교착이 이런 구조적 문제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조만간 대화가 재개되더라도 본질적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제 우리 정부는 햇볕정책의 마무리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각종 ‘게이트’와 수지 김 사건 등에 따른 국정원의 기강 와해, 정부 대북정책 수뇌부 내의 미묘한 이견, 정부의 전반적인 정책추진력 약화 등으로 미루어 어차피 새로운 대북 이니셔티브를 취하기도 어려운 현실이다.

그렇다고 지난 몇 년이 남북관계에서 잃어버린 시간이 돼서는 안 된다. 햇볕에 들어간 천문학적 자원과 국민적 논쟁, 그에 따른 성과와 실패의 교훈 등은 결코 헛되이 흘려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김 대통령이 그간의 시행착오와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국민의 이해를 구해야 한다. “햇볕정책은 어차피 현 정부에서 다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식으로 두루뭉술 넘어가서는 곤란하다. 무엇이 성급했고, 어떤 점이 미흡했는지를 설명하고, 그간의 의혹들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명확히 밝혀야 한다. 그럴 때만이 햇볕정책은 그 성과와 함께 교훈이 다음 정권으로 이어질 수 있다.

김 대통령은 나아가 민주당 총재직 사퇴로 국내정치에서 과시하려고 한 초당적 자세를 남북관계에서도 분명한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총선 직전에 기습적으로 합의한 것과 같은 정치적 계산이 내년 대선과정에서 되풀이된다면 햇볕정책의 도덕성은 회복불능의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햇볕정책의 정신이 다음 정권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면, 햇볕정책이 부정해버린 과거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도 정당한 평가를 하고 햇볕의 뿌리를 거기에 접목시켜야 한다. 서독의 ‘독일정책’이 시대상황에 따라 서방정책·동방정책·통일정책의 정반합적 발전과정을 밟은 사실은 참고할 만하다.

이 정부는 햇볕정책을 표방하면서 이전의 대북정책을 싸잡아 ‘냉전적 대결정책’이라는 말로 그 정신과 성과를 전면 부정해 버렸다. 이런 식이라면 다음 정권이 햇볕정책을 송두리째 부정해버리더라도 할말이 없을 것이고, 우리의 대북정책은 그때그때 정권용 일회성에 그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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