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오시겠지 하는 생각에 아버지 제사도 안 지내고 호적 정리도 하나도 안 했습니다.”

1950년 7월 초 서울 장충동에서 납치된 이종령(1909년생) 변호사의 막내딸 성의(62)씨는 13일 연합뉴스와 전화 인터뷰에서 “살아계신다면 백수를 넘기셨을 텐데 돌아가셨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면서도 이같이 말했다.

이씨는 “언젠가 돌아오시리라는 희망도 없지 않았지만 직접 나서서 아버지 호적을 정리하기가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게 사실”이라며 “우선 생사 여부만이라도 확인했으면 하는 게 저와 같은 모든 전시 납북자 가족의 바람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공식 출범하는 ’6.25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명예회복위원회’(이하 위원회) 사무국 개소식에서 납북자 가족 대표로 편지를 낭독하는 그는 “생사 여부와 함께 그동안 어떻게 사셨는지 행적을 알고 싶다”면서 “돌아가셨다면 유해라도 모시고 왔으면 하는 게 소망”이라고 말했다.

1948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됐다가 1950년 5월 퇴직하고 변호사로 개업했던 이씨의 부친은 1950년 7월 초 북한 인민군에 납치된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것까지 확인됐다.

이씨는 “9.28 서울 수복 이후 어머님이 큰 오빠와 서대문형무소로 다시 면회를 갔을 때 이미 아버지는 다른 곳을 옮겨진 상태”였다며 “그 이후로 지금까지 아버지 소식을 하나도 들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6.25 전쟁으로 아버지, 어머니와 7남매(2남5녀)의 대가족이던 이씨 가족은 말그대로 풍비박산이 났다고 한다.

아버지가 납치된 후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황해도 연백의 외가에 갔던 둘째 오빠와 둘째 언니는 휴전협정 체결 이전에 서울로 오지 못하고 영영 소식이 끊겼다.

바로 위의 넷째 언니는 전쟁 중 을지로 7가에 있던 집 마당에서 같이 놀던 중 총에 맞아 숨졌고 참전했던 큰 오빠는 전쟁이 끝난 뒤 이름 모를 병에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남겨진 세 딸만 데리고 홀로 모진 고생과 억울함을 참으며 살으셔야 했던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빈자리는 너무나 크고 깊었다”면서 “어머님은 1993년 ’나 죽거든 내 가슴을 좀 열어봐라. 얼마나 타 있는지 보게’라는 말씀을 남기고 돌아가셨다”며 울먹였다.

그는 “어머님은 아버지가 살아계시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늘 하셨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이북에 있는 둘째 오빠와 둘째 언니는 꼭 만나셨으면 했는데 그것도 안 됐다”며 “위원회에서 아버지를 대한민국 국민으로 되돌려 준다면 돌아가신 어머님에게도 적게나마 위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