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프리드 헤커 스탠퍼드대 국제안보협력센터 소장이 지난 13일 중국 베이징에서 기자들에게 방북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북한은 헤커 박사에게 1000여개의 원심분리기를 갖춘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여줬다. /AP 연합뉴스


북한이 1990년대 초반 이후 20년 가까이 한반도를 핵(核) 공포에 몰아넣었던 ‘플루토늄’보다 진화된 방식의 핵폭탄 원료인 ‘고농축 우라늄(HEU)’ 카드를 새로 꺼내 들었다. 천안함 국면을 모면하기 위해 북한은 스스로 박차고 나간 6자회담을 다시 열자며 공세를 펴고 있지만, 한·미가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먼저 보여야 한다”며 버티는 국면에서다.

◆비핵화 대신 우라늄 카드

북한이 6자회담 재개 의사를 밝히고 중국도 “이제 천안함 얘기는 그만하자”며 한·미·일을 설득하고 있지만, 한·미는 북한의 태도 변화를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다. 북한이 원하는 미국과의 직접 접촉에 대해 미국은 “남북관계 개선이 우선”이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북·미 직접 대화6자회담보상으로 이어지던 기존의 패턴이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있다.

북한은 탈출구로 비핵화 의지를 약속하는 대신 우라늄 농축이라는 새로운 위협 카드를 꺼냈다. 북한은 이번에 헤커 박사에게 원심분리기 수백 개를 공개하면서 “(우라늄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기 2000대가 이미 가동 중”이라고 밝혔다. 북한이 2000대라는 숫자를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원심분리기 2000대 정도가 있으면 연간 1개의 우라늄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핵 전문가 분석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북한이 원하는 협상에 응하지 않을 경우 북한이 매년 핵폭탄 1개씩 추가 지렛대를 갖게 될 것이라는 위협을 내비친 것이다. 북한은 이미 플루토늄 40여㎏을 추출해 최대 6~8개의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은 우라늄 핵카드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에너지 지원 등 물질적 보상은 물론, 평화협정 체결 같은 체제보장을 보상으로 얻어내기 위한 것이란 관측도 있다. 북한은 1993~94년 1차 북핵위기는 경수로발전소 건설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제네바합의로, 2002~2003년 2차 북핵위기는 경수로와 에너지 지원을 담은 6자회담과 9·19 공동성명 형태로 각각 보상받거나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북한은 비핵화 약속을 어기고 플루토늄을 계속 개발해 핵실험을 2차례나 성공했었다. 한·미는 “북한의 우라늄 농축은 6자회담 재개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면서도, 코앞의 현실로 다가온 ‘3차 북핵 위기’를 막기 위해 북한과 또 한 번의 어려운 협상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게 됐다.




◆고농축 우라늄의 위험성

핵폭탄의 양 축인 플루토늄탄에 이어 우라늄탄 기술까지 갖고 있다는 북한의 자진신고에 세계가 긴장하는 것은 고농축 우라늄이 가진 은닉성과 이동성 때문이다. 은밀하게 우라늄을 농축해 핵폭탄 원료를 만들고, 이렇게 만든 핵폭탄 원료를 국제 감시망을 피해 테러집단에 몰래 팔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핵폭탄은 제조 원료에 따라 플루토늄탄과 우라늄탄으로 나뉜다. 플루토늄과 우라늄 모두 원재료는 천연 우라늄이다. 그러나 핵분열을 일으키는 물질인 플루토늄과 우라늄235를 얻어내는 방식이 다르다. 플루토늄을 만들려면 천연 우라늄을 정제한 뒤 핵연료봉을 만들고, 원자로에서 태워 사용후 연료를 얻어야 한다. 사용후 연료를 대규모 재처리시설을 통해 가공하면 플루토늄을 분리할 수 있다. 원자로나 재처리시설은 워낙 덩치가 큰 데다 재처리 과정에서 굴뚝 연기와 방사능 물질이 나오기 때문에 첩보위성이나 방사능 계측을 통해 제조과정이 노출되기 쉽다.

우라늄 농축 방식은 기체확산법이나 원심분리법 공정을 통해 천연 우라늄에는 0.7%에 불과한 우라늄 235의 비율을 90%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이다. 북한이 이번에 공개한 원심분리기의 경우 약 1000대를 설치하는 데 900㎡ 정도의 작은 공간만 있으면 된다. 농축과정에서 발생하는 방사능도 낮아 은밀한 제조가 가능하다.

플루토늄을 만들던 영변 핵시설이 24시간 첩보 위성의 감시에 노출돼 있다면, 우라늄 농축 시설은 언제 어디서 어느 정도 규모로 진행되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농축 우라늄은 제조 증거를 잡기도 어려워, 이를 몰래 해외로 반출해 테러집단이나 다른 국가에 판매할 경우에도 파악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는 플루토늄보다 농축 우라늄을 비확산의 더 큰 적으로 보고 있다. 정부 당국자들이 하나같이 “북한의 우라늄 농축이 사실이라면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우상 기자 imagin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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