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종구 /전 국방부장관

국방부는 매년 정기적으로 발행해 국내외에 배부해 온 국방백서를 이번에는 발간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주적개념’의 삭제 여부가 그 이유임이 분명한 것 같다. 지난 제5차 남북 군사실무 회담에서 북한측 요구대로 삭제하자니 국민여론이 만만치 않을 것이고, 그대로 두자니 정부의 대북정책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YS 정권 때 누가 만든 용어인지 ‘주적’이라는 신조어 때문에 난처해진 곳이 국방당국이다. 군대에 있어 국가 존립과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대상을 ‘적’으로 명시하면 될 일을 주적(主敵)이니 조적(助敵)이니 애초에 구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작금의 ‘주적개념’ 논란이 한반도 안보여건의 반전이나 군 자체의 상황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정치권의 정치적 목적에서 제기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군사적 적대관계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적을 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무장한 적 앞에서 무책임하게 무장을 해제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군사적으로 볼 때 북한이 아직도 우리의 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재론의 여지가 없다.

첫째, 북한군은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현재적 적이다.
북한은 117만명의 현역과 750여만명의 예비병력을 갖고 있다. 지상군 200여개 사·여단, 각종 함정 990여척, 전투기 1700여대 등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병력과 장비의 대부분이 휴전선 근처에 배치돼 남쪽을 겨냥하고 있다. 눈 앞에서 우리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군대를 놓고 우리가 적이 아니라고 한다면 소가 웃을 일이다. 군사적으로 북한은 의도와 능력면에서 여전히 현존하는 가장 큰 위협적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둘째, 북한도 우리를 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조선노동당규약 전문(前文)은 당면목적을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여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 민주주의 혁명과업을 완수하는 데 있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또한 최종 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고 규정했다.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정면으로 상치되는 목표를 실현할 것을 명시적으로 밝혔다면 그 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상대방 즉 ‘남조선’은 북한의 입장에서 무엇인가. 적이다. 상대는 우리를 적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상대를 적이 아니라고 우기는 이율배반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셋째, 한반도는 아직도 휴전상태에 있다. 휴전이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전쟁이 잠시 멈춘 상태이고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군사적으로 본다면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과 같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적이 없는 전쟁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지금 허깨비 붙들고 씨름하고 있다는 얘기인가. 오늘도 국가 방위 업무에 임하고 있는 장병들에게 ‘무엇을 위해’ 고향을 떠나,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복무기간을 보내라고 할 것인가.

따라서 북한이 한반도 적화야욕을 완전히 포기하고 이를 행동으로 입증할 때까지 북한군이 우리의 제1차적 적이란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특히 정치권은 튼튼한 안보만이 대북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북쪽 눈치를 보며 주적개념을 삭제하도록 국방부에 무리한 압력을 가해선 안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국방부가 북한이나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본연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국방백서의 주적개념 명시를 비난해온 북한이 24일 방송을 통해 국방백서 격년제 발간에 대해서도 비난한 것은 북한 눈치보기가 소용없음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국방부의 소신 있는 행동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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