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민
/중앙대 예술대학원 재학. 전 북한군 예술선전대 작가(대위).

나의 아버지 김순석에게는 ‘첫’자가 붙은 직함이 많았다.

해방후 첫 북한 등단시인, 작가동맹 함경북도 첫 지부장, 작가동맹 첫 시(시)분과 위원장, 작가동맹 기관지 ‘조선문학’의 첫 편집위원, 김일성종합대학의 첫 창작지도 교원, 중앙당 통일전선부 작가실의 첫 작가...

우리 가족은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의 작가 아파트에 살았고, 나는 평양의 명문인 대동문인민학교와 련광중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게다가 시분과 위원장의 아들로 학급반장과 소년단 간부를 연임할 수 있었다. 장군의 아들은 장군이 되고 비서의 아들은 비서가 되는 나라에서, 적어도 작가 자식들의 집단에서 나의 위치는 확고했다.

아버지와 나의 이같은 권위가 일시에 무너진 것은 1971년 12월 30일, ‘당중앙의 선물’이 작가아파트의 몇몇 집에 전달될 때 우리 집이 빠지면서부터였다. 선물이라고 해봐야 귤 한 상자와 태평술 두 병에 새해 달력이 전부였고, ‘당중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몰랐던 나는 "그까짓 것" 해버리고 말았지만 설날 아침까지도 아버지의 침울한 얼굴은 펴질 기색이 아니었다. 해마다 첫 새벽에 인사차 들리던 친지와 어버지 제자들도 그 해에는 해가 중천에 뜨고 난 뒤에야 잠시 들렀다 사라졌다.

며칠 후 나의 의문은 같은 학급 동료들에 의해 풀렸다. 당중앙의 선물을 받은 작가 석윤기의 아들 석남진과 최승칠의 아들 최하림의 이야기는 명쾌했다. 선물을 하사한 분은 "김일성 원수님의 자제분"으로 "수령님의 후계자"이고, 선물을 받았는가 받지 못했는가에 따라 당의 신임이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코흘리개들의 이야기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그해 2월부터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 드리는 충성의 선서모임’이 학교에서 진행됐고, 집집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초상화를 모셔야 했다. 석윤기가 작가동맹 부위원장으로 발탁되는가 하면 이름도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최승칠은 4.15문학창작단을 거쳐 당중앙위원회 당역사연구실로 옮겼다.

석윤기의 아들에게 학급반장 자리를 빼앗기고 최승칠의 아들에게 소년궁전 물리소조 책임자자리를 내놓으면서 나 자신의 처지도 심각해졌다. 아버지의 서재는 늘 뽀얀 담배 연기에 잠겨 있었다. 아버지가 하는 일이란 밤마다 대동강변에 나가 낚싯줄을 늘어 놓는 것뿐이었다. 주변사람들은 “공화국 최대의 시집(시집)을 가지고 있는 김순석이 시 한편 쓰지 못하고 일년을 보내다니...”라며 혀를 찼다.

또 다시 새해가 밝았다. 이번에는 지도자동지의 선물에 노루고기에 산삼뿌리까지 섞여있었다. 학급친구인 방세림의 아버지인 평론가 방연승과, 아래층 강소영의 아버지인 평론가 강능수가 선물을 받았다. 아버지는 서재의 문을 아예 잠그고 낚시꾼으로 변신했다. 대동강 숭어나 보통강의 붕어 중에 큰놈이 걸린 날은 손수 먹을 갈고 붓질을 한 다음 흰 종이에 "고기도장"을 꾹 찍어 놓았다. ‘그런 건 해서 무얼 하는가’ 라고 묻는 나에게 "무슨 일을 하든 흔적이야 남겨야지" 하시던 아버지의 눈빛이 지금도 뇌리에 선하다.

‘문학예술의 대가이시며 영명하신 지도자 김정일 동지’가 선전선동부문을 진두지휘하면서부터 시 한편 지어내지 못한 아버지는 몇몇 작가들이 다시 천연색 텔레비전을 선물로 받던 1974년 12월 24일, 쉰 다섯 나이로 돌아가셨다. 30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몇 년 후 내가 인민군에서 문학공부를 하고 있을 때 북한 ‘애국가’의 작사자 박세영선생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다.

“너의 아버지는 사상의 문외한이었어. 자연주의자이거나 향토시인이라고 할 만하지. 이 나라에서 시인이 사는 길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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