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소설가 레르몬토프가 쓴 글에 이런 게 있다.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남편이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보통 논리이다. 여성의 논리는 이렇게 된다. 나에게는 남편이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 ’

이렇게 논리의 순서를 조금만 바꿔도 궤변이 된다. 레르몬토프가 말하는 여자의 논리는 분명 궤변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궤변이 아니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궤변인 줄 뻔히 알면서도 억지를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래서 궤변은 고약하다.

6·25전쟁 발발 50주년이 된다면서 미국의 텔레비전방송은 지난 한 달 동안 연일 한국전쟁 때 몇 만명의 미군용사가 전사하고 몇 십만이 부상했는가를 알려왔다. 분명 그것은 온 세계가 잊을 수 없는 비극이다. 그러나 우리는 애써 모든 6·25관계 기념행사를 축소하였다.

언론도 소리를 죽였다. 25일 한국전쟁에 관련된 프로는 어느 텔레비전방송에도 없었다. 그저 국영방송국 하나만이 대통령이 나오는 기념식을 40분간 중계하고 ‘6·25전사자 유해찾기’라는 특집프로를 방영했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잊어야 할 것이 있고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도 있다. 우리가 해마다 6·25기념행사를 하는 것은 전쟁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되씹기 위해서이다. 같은 민족끼리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되새기는 것도 다시는 그때처럼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리는 비극이 없도록 서로가 다짐하기 위해서이다.

올해로 우리는 꼭 5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다른 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하루를 지냈다. 신문들도 별다른 특집기획 없이 보냈다. 이제 이 날은 4·19만도 못한, 5·18만도 못한 역사의 한 화석(화석)처럼 되어버렸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참전용사들 가슴에 다는 훈장들은 뭣을 의미하는 것인가? 수십만의 전사자가 묻힌 국립묘지를 왜 지금까지 성역화했던가?

지난번 정상회담 때 북쪽에 따라간 ‘취재기자’는 50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취재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초의 예정보다 하루 늦게 회담이 개최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취재한 기자는 물론 없었다.

평양 북쪽에 있는 순안공항에서 김 대통령이 묵었던 백화원 영빈관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그런데도 왜 50분이나 걸려서 빙빙 돌아갔는지에 대한 추측기사를 쓴 기자도 없었다.

혹자는 “김일성 아들”이라 하고 혹자는 “김 위원장”이라고 부르는 “그분”의 육성을 우리는 처음으로 생생하게 들었다. 그러나 북한인지 ‘북반부’인지의 텔레비전에서는 음성은 일절 들려주지 않았다. 회담기간에 방영된 뉴스시간에도 김정일이 말하지 않은 장면의 영상만이 방송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외국 언론을 통해서만 알았다.

우리네 취재기자들이 취재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취재를 못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에 대한 얘기도 없다. 취재기자들에게 있어 이처럼 큰 모순은 없을 것이다.

이산가족방문단 교환문제를 논의할 금강산의 적십자회담 때에는 그나마 단 두 명만이 취재기자로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정상회담 때나 마찬가지로 외신기자들은 얼씬도 하지 못한다. 그게 얼마나 모순에 찬 것인가를 따져보는 기사도 눈에 띄지 않는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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